제2부
가계의 경제:
미시경제학적 관점
제11장 가계의 경제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의 가계 전체를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활동과 지침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것은 거시경제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경제를 살펴본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의 통치와 관리의 많은 부분이 정부에 위탁되어 수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제는 국가나 사회 전체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계는 그 안에 속한 수많은 개인과 개별 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와 관리는 각 개인과 가계의 일상적인 경제생활에도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개인이 어떻게 소득을 얻고, 무엇을 소비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과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도 하나님의 경제와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 전체를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그 가계를 구성하는 개인과 개별 가계의 경제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가계 전체에서 개개인 또는 개별 가계의 경제로 관심을 옮기고자 한다. 이것은 개인이 자신과 자신의 가계를 위하여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우리 연구의 미시경제학적 관점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은 자신이 소유한 재산과 자원의 절대적인 소유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따라서 개인의 경제적 의사결정은 단순히 자신의 효용이나 만족을 극대화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가계를 어떻게 그의 뜻에 따라 책임 있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것이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개인과 가계의 경제의 출발점이다.
만족(滿足)의 극대화(極大化)
경제학에서 각 개인의 경제적 목표는 소비자로서 자신의 효용, 곧 만족이나 행복을 극대화하거나 기업의 소유자로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를 의미하는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 oikonomia)의 첫 번째 의미는 “청지기직 또는 가계의 관리”이다. 각 개인은 소비자이든 기업의 소유자이든 가계의 관리자로서 자신과 자신의 가계가 얻는 만족을 극대화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개인은 자신의 경제활동을 통하여 어떻게 만족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 경제활동이란 무엇인가? 경제학에서 개인의 경제활동은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 곧 소비자로서 그리고 생산자로서 하는 의사결정을 말한다. 개인은 소비에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을 더 많이 얻거나 생산 또는 사업을 통하여 더 많은 소득이나 이윤을 얻을 때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비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가계와 소비자들도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인 기업과 생산자들도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효용이나 만족 또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과 방법은 비그리스도인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 가계와 소비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가운데 자신의 효용과 만족을 극대화하며, 그리스도인 기업과 생산자 역시 그러한 원리에 따라 이윤을 추구하고 극대화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어떻게 극대화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극대화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가계를 돌보고 관리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가계가 더 큰 하나님의 가계에 속해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산과 소득과 자원을 그의 뜻에 따라 책임 있게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효용 극대화는 단순히 자신의 물질적 만족을 최대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계를 올바르게 관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데서 얻는 만족까지 포함한다.
청지기의 직분
휴 웰첼(Hugh Whelchel)은 그의 글 「성경적 청지기직의 네 가지 원리」(“Four Principles of Biblical Stewardship”)에서 다음 네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첫째, 소유권의 원리, 둘째, 책임의 원리, 셋째, 책무성의 원리, 넷째, 보상의 원리이다.[36]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소유 가운데 작은 부분을 잘 돌보고 관리하는 것임을 인정할 때 웰첼의 네 가지 원리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가계라는 작은 단위를 청지기로서 돌보고 관리하는 출발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창 2:15).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자신의 동산을 맡기시고 그것을 돌보고 관리하는 청지기 또는 관리자의 역할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5장 23-24절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토지나 집이나 재산 또는 돈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가계를 잘 돌보고 관리하는 청지기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 주는 말씀과,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 또는 이 땅의 거류민으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일시적으로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모세는 신명기 10장 1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라고 말한다. 시편 24편 1–2절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인 에녹(창 5:22), 노아(창 6:13), 아브라함(창 12:1–3), 모세(출 3:4 이하),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을 부르실 때, 하나님의 백성은 세속적인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과 자신에게 맡겨진 위탁된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가계를 돌보고 관리하는 청지기 또는 관리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모세는 신명기 8장 17–1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상기시키며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재물을 얻고 그것을 증가시킬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현실적으로 우리의 소유로 인정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맡아 관리하고 사용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하는 청지기이다.
다윗도 역대상 29장 14절에서 하나님께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조차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소유한 돈과 재산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유하고 사용하도록 허락하시고 맡겨 주신 것 가운데 일부를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탁된 소유권과 청지기직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의 가계 관리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2–4절에서 영리한 청지기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영리한(그러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들었던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영리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그를 칭찬하였다(눅 16:8). 그러나 그의 부정직함이나 불의함 자체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청지기가 영리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부정직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계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는 세상의 관리자보다 더욱 영리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0–12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충성된”이라는 형용사의 말은 ‘피스토스’(πιστός, pistos)에서 온 것이며, “맡기겠느냐”라는 동사의 말은 ‘피스튜오’(πιστεύω, pisteuō)에서 온 것이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재산 또는 가계를 관리하는 우리는 신실하고 충성된(πιστός, pistos)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을 주실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함과 충성됨(πιστός, pistos)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권은 진정한 의미에서 궁극적인 소유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위탁된 소유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유는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 참된 소유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서로 다른 액수의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이 그 달란트를 자신들에게 소유물로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자신의 재산인 달란트를 그들에게 맡기고 여행하는 동안 그것을 관리하게 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4절). 그러나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은—이는 예수님의 재림을 암시한다—종들에게 맡겼던 달란트를 모두 거두어 가지 않고, 처음에 맡겼던 달란트와 그것을 통하여 얻은 이익을 그들이 가지도록 하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28–29절에서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주인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종에게 주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주인의 소유였으며 종들에게 관리를 위하여 맡겨졌던 달란트가 결산 후에는 충성된 종들이 가지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달란트 비유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청지기직과 장차 주인이 돌아와 결산할 때 충성된 청지기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함께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영적 은사를 주시고(롬 12:6–8; 고전 12–13장; 엡 4:11; 벧전 4:11), 그 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더욱 효과적이고 지혜롭게 관리하게 하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영적 은사의 참된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이 재물이든, 토지이든, 영적 은사이든,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이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잘 돌보고 관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가계 경제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과 자원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돌보고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재물과 토지, 시간과 노동, 재능과 영적 은사 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며, 우리의 소유권은 궁극적인 소유권이 아니라 위탁된 소유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의사결정의 목적은 단순히 자신의 효용이나 만족을 극대화하거나 더 많은 재산과 이윤을 얻는 데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신의 가계를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자신의 만족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 많든 적든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자랑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도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청지기의 비유들이 보여 주듯이,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맡긴 것을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관리하는 것이다. 언젠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에 대하여 결산하실 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계 경제란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것을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관리하는 청지기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자신의 가계의 참된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각 개인이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자신은 그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소득과 재산은 현실적으로 우리의 소유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가계의 경제를 운영하는 목적은 단순히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이 소비하며 재산을 증가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그의 뜻에 따라 지혜롭고 책임 있게 관리하는 데 있어야 한다.
첫째, 자신의 능력과 재산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사용하여 소득을 얻고 재산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신 8:17–18). 따라서 경제적인 성공을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소득의 범위 안에서 지혜롭게 소비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가계의 경제에는 수입뿐만 아니라 소비, 저축, 투자와 같은 여러 가지 의사결정이 포함된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별하고, 충동적인 소비와 지나친 사치를 피하며, 현재의 필요와 미래의 필요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저축과 투자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산을 보존하고 증가시키며 장래의 필요에 대비하기 위한 책임 있는 관리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셋째, 지나친 부채를 경계하고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맞게 살아야 한다. 부채는 주택 구입이나 교육, 사업과 같이 필요한 목적을 위하여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부채는 개인과 가계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따라서 돈을 빌릴 때에는 현재의 필요뿐만 아니라 앞으로 갚을 능력까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며, 빌린 것은 성실하게 갚아야 한다.
넷째, 가계의 경제적 목표를 자신의 만족에만 두어서는 안 된다. 경제학적으로 개인은 자신의 효용과 만족을 극대화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더욱 온전해질 수 있다. 따라서 무엇을 사고, 얼마나 소비하고, 어디에 투자하며,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만족을 주는가?”뿐만 아니라 “이 결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해야 한다.
다섯째, 자신에게 주어진 풍요를 다른 사람의 필요와 연결하여 생각해야 한다.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는 자신의 가계만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더 많이 맡겨 주셨다면 가족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과 믿음의 공동체를 돌아보고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말한 평균의 원리처럼, 우리의 풍요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우는 데 사용될 때 재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여섯째, 돈을 삶의 목적이나 주인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재물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가족을 돌보며 다른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중요한 수단이지만, 그 자체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마 6:24), 그리스도인의 가계에서는 재물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하여 결산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청지기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주인에게 맡은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란 단순히 재산을 많이 축적한 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많이 벌었느냐 적게 벌었느냐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관리하였느냐가 더 중요하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어떻게 잘 관리하고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여 소득을 얻고, 필요한 것을 지혜롭게 소비하며, 미래를 위하여 저축하고 투자하고, 지나친 부채를 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한다. 이 모든 경제적 의사결정에서 하나님을 가계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치는 지혜로운 가계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제12장 가계의 청지기
하나님의 최초의 부르심
휴 웰첼(Hugh Whelchel)은 창세기 1장 28절이 인간에게 주어진 청지기의 직분에 대한 최초의 부르심이라고 말한다.[37]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를 위하여 그들을 창조하시고 부르셨다. 이러한 복에 대한 부르심은 제9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타난다(창 9:1, 9; 17:6, 20; 28:3; 35:11).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복을 주시는 한편,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 동산을 경작하며 돌보게 하셨다(창 2:15). 이러한 삶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청지기의 직분을 충성스럽고 신실하게 수행하기를 원하셨으며,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곳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하셨다.
청지기는 의사결정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종과 다르다. 종은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지만, 청지기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관리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창세기 15장 2절에서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내 집의 청지기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신실한 종이었으며,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그를 자신의 집의 “청지기,” 곧 ‘메셰크’(מֶשֶׁק, mešeq)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상속자”로 번역되기도 한다. 히브리어 메셰크는 그 어원이 분명하지 않지만, 어원적으로 “취득(acquisition)” 또는 “소유(possession)”를 의미한다.[38]
구약성경에서 청지기의 역할을 잘 보여 주는 또 다른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이다. 보디발은 요셉을 자신의 집과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자로 세웠다. 창세기 39장 4절은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라고 말한다. 보디발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겼으며, 요셉이 관리하는 것 외에는 자신이 먹는 음식밖에 알지 못하였다(창 39:6). 여기에서 우리는 청지기직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소유권은 여전히 주인에게 있지만,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그에게 부여한다.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자신도 자신의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를 두었다(창 43:16, 19; 44:1, 4).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청지기는 단순히 주인의 명령만 수행하는 종이 아니라, 주인의 소유를 위탁받아 일정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청지기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시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성경의 청지기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신약성경의 청지기
앞에서 설명했듯이, 헬라어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 oikonomos)는 오이코스(οἶκος, oikos, 집 또는 가계)와 네모(νέμω, nemō, 관리하다 또는 분배하다)의 합성어로, 영어의 “청지기(steward)” 또는 “가계의 관리자(household manager)”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청지기직을 이해하는 데 잘 들어맞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가계의 진정한 소유자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를 위탁받아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작은 단위인 자신의 가계를 돌보고 관리하는 위탁된 소유자이자 관리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42–44절에서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뿐만 아니라 그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 곧 다른 종들도 돌보고 관리한다. 따라서 청지기 또는 관리자는 주인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과 재산을 모두 맡아 돌보고 관리해야 하므로 책임을 다해야 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하여 주인에게 결산할 책무가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48절에서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청지기에게 더 많은 것이 맡겨질수록 그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책무도 그만큼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누가복음 16장 1–1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불의하나 영리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고발을 받았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청지기에게 맡기고 그의 능력에 따라 그것을 관리하게 하였지만, 그것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잘 관리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3절에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가계의 청지기로서 우리는 주인에게 맡겨진 돈을 소유하거나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신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우리는 돈을 하나님보다 앞에 두어서는 안 된다. 돈은 우리가 섬겨야 할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셔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하고 사용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 11–27절에서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와 유사한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는 달란트 비유를 변형한 것처럼 보이며, 이야기의 일부만 전해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떠나기 전에 열 명의 종을 불러 열 므나를 나누어 주었다. 곧 각 종에게 한 므나씩을 주었다. 한 므나는 당시 보통 노동자의 약 3개월 임금에 해당하였으며,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500만 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 돈으로 장사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주인이 맡긴 돈을 가지고 사업가처럼 그것을 운용해야 했다. 왕위를 받아 돌아온 주인은 자신이 돈을 맡긴 종들을 불러 각각 장사를 하여 얼마나 이익을 남겼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눅 19:15). 열 명의 종 가운데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에서와 같이 세 명의 종만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첫 번째 종은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더 벌었다고 보고하였다. 주인은 그를 칭찬하고 열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주었다. 두 번째 종은 다섯 므나를 더 벌었다고 보고하였다. 주인은 그에게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은 자신이 받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주인은 그를 책망하면서 누가복음 19장 22–23절에서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나는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인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진 종에게 주라고 명한 후,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라고 말한다(눅 19:26).
이 비유에서는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와 달리 모든 종에게 동일한 액수인 한 므나씩이 주어졌다. 따라서 종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서로 다른 액수를 받았다는 데서 생길 수 있는 불공평, 질투 또는 미움의 문제는 없다. 그러므로 세 번째 종은 자신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가 다른 종들보다 적었다는 이유로 변명할 수 없었다. 그는 주인에게 받은 한 므나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문제는 주인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과 불충성, 그리고 게으름에 있었다.
앞에서 다뤘지만, 더 잘 알려진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는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나온다. 이 비유의 상황은 누가복음 19장 11–27절의 므나 비유와 비슷하다. 주인은 세 종에게 각각 그들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액수의 달란트를 맡긴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9장 11–27절에서 각 종에게 한 므나씩 동일하게 나누어 주는 것과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서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액수의 달란트를 나누어 주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공평한 분배인가?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께 받은 재능이나 은사가 적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 각 사람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계의 청지기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나 은사의 많고 적음을 불평하기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서 주인은 한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다른 종에게 두 달란트를, 세 번째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 한 달란트는 약 6,000데나리온에 해당하였으며, 한 데나리온은 당시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였다. 따라서 한 달란트는 보통 노동자의 약 20년 임금에 해당하며,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2억 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결산하였다. 첫 번째 종은 자신이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였다(마 25:21). 두 번째 종도 두 달란트를 더 남겼다고 보고하였다.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였다(마 25:23). 주인은 이 두 종에게 정확히 동일한 말로 칭찬하였다. 이것은 종들이 얻은 성과에 따라 서로 다른 고을을 맡긴 누가복음 19장 11–27절의 므나 비유와 다른 점이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은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주인은 마태복음 25장 26–27절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라고 그를 책망하였다. 그리고 주인은 그 종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종에게 주라고 명하고,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고 말하였다(마 25:2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청지기인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능과 은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능과 은사의 종류와 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관리하고 사용하였느냐이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이 서로 다른 액수의 이익을 남겼음에도 주인에게 똑같은 칭찬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청지기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과 동일한 성과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한 충성이다.
누가복음 19장 11–27절과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맡겼을 때, 그는 종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고 그 돈으로 장사하거나 그것을 활용하여 일하라고 하였다. 종들은 자신이 계획한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 곧 돈과 노동, 그리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활용하여 사업을 시작하고 운영할 수 있는 기업가들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우리가 계획하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신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분야에서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하고, 노동과 인적 자본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자원을 잘 활용하는 기업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수행하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위한 이익을 극대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익은 반드시 금전적인 이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맡기신 일의 성격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유익과 열매를 포함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 여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비밀은 오랫동안 여러 세대에 감추어져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리킨다.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다.
바울은 디도서 1장 7–9절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의 감독이 갖추어야 할 자격을 설명하면서 감독을 “하나님의 청지기,” 곧 ‘오이코노모스 데우’(οἰκονόμος Θεοῦ, oikonomos Theou)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회에서 감독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청지기 또는 관리자로서 이러한 자질을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10–11절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잘 관리하고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자신의 가계를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 또는 관리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물과 토지뿐만 아니라 노동, 시간, 인적 자본, 재능과 영적 은사, 그리고 복음과 하나님의 비밀까지 맡기셨다. 청지기는 단순히 주인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종이 아니라, 주인이 맡긴 것을 자신의 판단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사용하여 관리할 수 있는 일정한 자유와 책임을 가진 관리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다른 재능과 은사와 자원을 맡기시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도 허락하신다.
예수님의 므나와 달란트 비유가 보여 주듯이,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얼마나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관리하고 사용하였느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이 맡겨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적은 것이 맡겨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청지기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맡겨진 것에 대한 충성이다. 청지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과 재능을 낭비하거나 땅에 감추어 두어서는 안 되며,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하나님을 위한 유익과 열매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되며, 모든 청지기는 언젠가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하여 결산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청지기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를 위탁받은 청지기로서 자신의 가계를 충성스럽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가계를 더욱 잘 돌보아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며(고전 4:2), 베드로가 가르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를 섬겨야 한다(벧전 4:10). 결국 좋은 청지기의 목적은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사용하여 하나님께 유익한 열매를 맺고, 그 모든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다.
제13장 기업가 정신과 자원의 활용
기업가의 자질(資質)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은 위험을 감수하고 자원을 결합하여 혁신적인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이윤을 추구하는 개인의 창의적인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39] 자원(resources)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하여 기업가가 조직하고 결합하는 기본적인 생산요소의 범주를 말한다. 기업가 정신은 또한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전환하는 기술” 또는 “개인이 현재 자신이 통제하고 있는 자원에 구애받지 않고 기회를 추구하는 과정”으로 정의되기도 한다.[40] 배린저(B. R. Barringer)와 아일랜드(R. D. Ireland)에 따르면, 성공적인 기업가의 특성에는 사업에 대한 열정, 제품과 고객에 대한 집중,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 그리고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으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된다.[41] 기업가는 자신의 사업에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창의적인 사고와 리더십을 갖추고,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노력하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프 로즈(Jeff Rose)는 기업가들에게 필요한 다음의 열 가지 성경 말씀을 제시한다:[42]
1.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2.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3.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 20:4)
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5.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6.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8.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 14:23)
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10.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잠 21:5)
로즈가 제시한 이상의 열 가지 성경 말씀을 종합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기업가의 자질과 기업가 정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기업가는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일해야 하며(잠 10:4; 20:4), 말과 계획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로 행동하고 수고해야 한다(잠 14:23). 또한 조급하게 행동하기보다 지혜와 명철을 구하고 신중하게 계획하며 자신의 일을 경영해야 한다(잠 4:7; 21:5).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거나 지나친 수고를 통하여 자신의 힘만으로 성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잠 23:4; 시 127:2). 그리스도인 기업가는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고객, 직원, 동업자와 그 밖의 사람들을 대하며(마 7:12),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고 주님께 하듯 마음을 다하여 일해야 한다(골 3:23–24). 무엇보다도 온 세상을 얻는 것과 같은 큰 성공을 이루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막 8:36). 따라서 그리스도인 기업가에게 사업의 성공과 이윤은 중요할 수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돈을 버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원과 재능을 부지런하고 지혜롭고 정직하게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업가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가는 부지런해야 하며,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어야 하며, 기꺼이 일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한 사람을 위하여 일하듯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여 일하며, 좋은 잠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지혜와 명철을 얻어야 한다. 말만 하기보다 행동으로 옮기며,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이와 같이 부지런한 기업가의 계획과 경영은 풍부함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기업가들
성경에 나타난 기업가들은 시간과 돈, 지혜와 지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일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어 낸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수행한 일은 금전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기업가들은 누구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젊은 시절의 솔로몬,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달란트와 므나 비유에 나오는 충성된 종들, 바울 등을 들 수 있다.
1. 아브라함
성경에서 부유하게 된 최초의 인물은 아마도 아브라함일 것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추론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 가지, 곧 땅과 민족들과 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의 가장 큰 강점은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다(창 12:1–4; 히 11:8). 또한 시험을 받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도, 자신의 순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다(창 22장; 히 11:17–19).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창 15:6).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기독교의 믿음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두 개의 중요한 구약성경 말씀은 창세기 15장 6절과 하박국 2장 4절이다. 바울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을 로마서에서 반복하여 인용하거나 언급하며(롬 4:3, 5, 9, 22), 갈라디아서에서도 인용한다(갈 3:6). 또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로마서 1장 17절과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서 인용한다. 이 두 말씀은 바울이 믿음과 의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성경적 토대가 된다.
창세기 13장 2절은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를 낭비하지 않고 여호와를 신뢰하면서 그것을 더욱 늘려 갔다. 아브라함은 벧엘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3:4). 그는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보는 근시안적인 사람이 아니라 관대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과 롯의 양 떼와 소 떼가 많아지자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이에 아브라함은 창세기 13장 8–9절에서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제안하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조카인 롯에게 자신보다 먼저 땅을 선택하도록 양보하였다. 그러자 롯은 소알까지 온 요단 지역을 선택하였는데, 그곳은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창 13:10).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롯이 선택한 지역에 있던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보여 준 관대함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3장 14–17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도록 양보한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확인해 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 후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창 13:18). 아브라함에게 물질적인 소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으며, 그의 삶과 경제활동의 근본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예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기업가적 자질의 근본은 단순히 부를 축적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위험을 감수하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자원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게 행동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데 있었다.
2. 이삭
이삭의 삶은 아브라함의 삶을 본받은 것과 같았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장점뿐만 아니라 약점까지도 반복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베푸신 복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두려움 때문에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아내 리브가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리브가를 차지하려고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하여,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그 사람들에게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라고 거짓말하였다(창 26:1–11).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던 사건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과 같았다(창 12:10–20; 20:1–18).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과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삭에게 물질적인 복도 주셨다. 창세기 26장 12–14절은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라고 말한다. 이삭은 그 땅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수고에 복을 주셔서 그가 백 배의 수확을 거두고 큰 부를 이루게 하셨다. 이삭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은 여러 면에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과 매우 비슷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신다(출 20:6). 그러므로 부모의 신실한 믿음과 삶은 자신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녀와 그 후손에게까지 선한 신앙의 유산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우리의 자녀와 그 후손에게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3. 야곱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얻고자 하였으며, 후에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받았다. 당시 아버지의 축복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연결된 중요한 축복으로 여겨졌다. 야곱은 에서가 몹시 배고파하였을 때 붉은 죽을 대가로 그의 장자권을 자신에게 팔도록 하였다(창 25:29–34). 그 결과 에서는 장자권을 잃었으며, 후에는 장자가 받을 아버지의 축복마저 야곱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의 야곱은 속임수를 사용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가 받을 축복을 대신 받았다(창 27:1–29). 에서는 자신이 장자권을 팔아버린 것에 더하여 아버지의 축복마저 야곱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것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야곱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창 27:35–41). 결국 야곱은 에서를 피해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도망가야 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 도망하는 동안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위험과 불안의 순간에 하나님을 절박하게 찾았을지도 모른다.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길에 루스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8장 13–15절에서 야곱에게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다음 날 아침 야곱은 자신의 머리 아래에 두었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곳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야곱은 창세기 28장 20–22절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하였다.
이때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아직 조건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무런 조건 없이 야곱과 함께하시고 그를 지키시며 약속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고, 자신을 지켜 주시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해 주신다면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서원하였다. 그의 믿음은 아직 아브라함과 같은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으며, 이후의 여러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성장해 가야 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부지런하고 지혜롭게 일하였다. 그곳에서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았으며, 그들의 두 여종 실바와 빌하를 통하여서도 자녀를 얻었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라반의 집을 떠나기 전까지 그에게는 열한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렸다. 또한 그는 자신의 노동과 지혜를 활용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창세기 30장 43절은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야곱은 여전히 에서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과거 자신에 대한 에서의 분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가족과 자신의 모든 소유를 얍복 나루 건너편으로 보내고 홀로 남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였다(창 32:22–24). 야곱은 끈질긴 사람이었다. 그는 그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창세기 32장 26절에서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결과 야곱은 ‘이스라엘’(יִשְׂרָאֵל, Yisra’el)이라는 새로운 복된 이름을 받았다. 그 사람이 창세기 32장 28절에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이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과 겨루다” 또는 “하나님과 씨름하다”라는 의미와 연결된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는 부지런함과 지혜와 인내를 보여 주었으며, 얍복 나루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보여 주었다.
야곱의 기업가 정신은 부지런함, 지혜, 인내, 끈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어려운 환경과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였으며, 자신의 지혜와 노동을 활용하여 많은 재산을 이루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오랫동안 인내하였고, 얍복 나루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끈기를 보여 주었다. 야곱은 처음에는 자신의 지혜와 방법을 의지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지만, 여러 시련과 경험을 통하여 점차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야곱의 삶은 기업가에게 필요한 부지런함과 지혜, 인내와 끈기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노력만을 의지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4. 요셉
요셉에게는 꿈이 있었다(창 37:5–11). 그의 형들은 그를 “꿈꾸는 자”라고 불렀다(창 37:19).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꾼 꿈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그 꿈들은 장래에 대한 비전과도 같았다. 그의 형들은 요셉을 죽임으로써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창 37:20). 그러나 결국 형들은 요셉을 죽이지 않고 지나가던 상인들에게 은 이십에 팔았다(창 37:28). 요셉이 은 이십에 팔린 사건은 유형론적으로 볼 때, 후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넘겨준 사건을 연상시킨다(마 26:14–16; 27:3). 그러나 요셉은 노예로 팔려 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 미래를 바라보며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요셉은 마침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앞으로 닥칠 7년의 풍년과 그 뒤를 이을 7년의 흉년에 대비할 계획을 제시함으로써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창 40–41장). 그는 미래에 닥칠 위기를 미리 내다보고 풍년 동안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요셉에게 꿈과 비전은 단순히 미래를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행동으로 이어졌다.
잠언 29장 18절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묵시”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존’(חָזוֹן, ḥāzôn)은 ‘환상’ 또는 ‘계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의 “묵시”를 현대적인 의미의 사업상의 ‘비전’이나 개인적인 ‘꿈’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미래를 내다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는 성경적 의미에서 요셉의 삶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며, 그 계획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었다.
요셉의 기업가적 자질은 비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성실함, 인내와 끈기, 지혜,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계획과 실행력, 그리고 뛰어난 자원관리 능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요셉은 어린 시절 하나님께서 꿈을 통하여 보여 주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간직하였으며, 노예로 팔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여 보디발의 집에서는 가정 총무가 되었고, 감옥에서도 책임 있는 일을 맡게 되었다(창 39장).
특히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예측하여 구체적인 대비책을 제시하였다(창 41장). 그는 풍년 동안 생산된 곡식을 체계적으로 저장하고 관리하여 흉년이라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요셉은 미래를 내다보고 위험을 예측하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뛰어난 관리자였다. 따라서 요셉의 기업가 정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믿음으로 붙들고,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지혜와 성실함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5. 다윗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며 자신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믿었다. 그는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소년 시절의 다윗은 물매와 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삼상 17:50). 이러한 승리의 근본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강한 믿음이 있었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선언하였으며(삼상 17:45),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믿었다(삼상 17:47).
다윗은 왕으로서 크게 성공하였지만, 그의 삶에 심각한 죄와 실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이자 무고한 사람인 우리아를 죽게 하는 중대한 죄를 범하였다(삼하 11장). 그러나 다윗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선지자 나단이 그의 죄를 지적하였을 때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하였다(삼하 12:13). 그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용서를 구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이처럼 다윗의 삶은 강한 믿음과 용기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다윗은 말년에 다시 실패하였다. 그는 자신의 군사력을 확인하기 위하여 백성을 계수하고자 하였다(삼하 24장; 대상 21장). 다윗이 요압에게 백성을 계수하도록 명령하자, 요압은 이스라엘에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 명이고 유다 사람이 50만 명이라고 보고하였다(삼하 24:9). 따라서 사무엘하의 기록에 따르면 다윗이 계수한 군사력은 모두 130만 명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러한 인구조사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성경은 다윗의 인구조사가 왜 죄가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가능한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이 보유한 군사의 수와 인간적인 힘을 확인하고 그것을 의지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인구조사가 끝난 후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하였다(삼하 24:10).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군사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년의 다윗은 자신이 보유한 군사의 수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는 유혹에 빠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업가적 삶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아무리 많은 자원과 능력,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능력과 자원을 최선을 다하여 활용하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인간의 능력과 힘만을 의지한다면 기업가적 삶에서도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 수많은 죄와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특별히 사랑하셨으며, 다른 왕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따르도록 명령하실 때 다윗을 신앙의 모범으로 자주 제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열왕기상 3장 14절에서 솔로몬에게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첫 번째 왕이 된 여로보암에게도 다윗을 모범으로 제시하셨다. 열왕기상 11장 3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완전하거나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후대의 왕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하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숨기거나 정당화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실패한 후에도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죄 가운데서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했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의 예에서 배울 수 있는 기업가적 삶의 중요한 교훈은 성공할 때에도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지 말아야 하며, 실패했을 때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우며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가에게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용기와 위험을 감수하는 자세,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잘못된 결정을 수정할 수 있는 겸손과 회복력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기업가는 다윗처럼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능력과 성공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우선해야 한다.
솔로몬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강점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다(왕상 3:5). 이에 솔로몬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기를 구하였다. 그는 열왕기상 3장 9절에서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였다.
솔로몬이 이러한 것을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열왕기상 3장 12–13절에서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솔로몬은 부와 명예를 먼저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혜와 분별력을 구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까지 주셨다.
솔로몬의 지혜와 뛰어난 판단력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며, 그의 명성은 이스라엘을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퍼졌다. 그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으며, 그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은 크게 번영하였다(왕상 4–10장). 이러한 의미에서 솔로몬의 가장 중요한 강점은 단순히 많은 부를 소유한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지혜와 분별력을 사용하여 올바른 판단과 의사결정을 내리는 능력에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고 그들이 가져온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하면서 그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솔로몬에게는 아내가 칠백 명이요 후궁이 삼백 명이었으며,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고 열왕기상 11장 3절은 말한다.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자 그가 누리던 하나님의 복도 계속될 수 없었다. 결국 솔로몬의 왕국은 그의 사후에 둘로 나뉘었다. 남쪽에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유다 왕국이 남았고, 북쪽에는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졌다(왕상 11–12장).
인간의 부와 영광은 일시적이다. 하나님께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마음을 구하여 칭찬받았던 솔로몬조차도 그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을 때 실패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기업가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하고 부유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성공한 후에도 계속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5:6–7). 그리스도인 기업가의 참된 성공은 자신의 부와 능력을 의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의 예에서 배울 수 있는 기업가의 성공과 실패의 중요한 교훈은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성공에 매우 중요하지만, 성공한 후에도 처음의 믿음과 원칙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가는 부와 명예 자체를 추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일과 의사결정에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또한 큰 성공과 부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공은 오히려 교만과 잘못된 선택의 위험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삶은 기업가에게 성공하는 것만큼 성공을 올바르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리스도인 기업가의 참된 성공은 자신의 지혜와 부를 의지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7. 잠언 31장의 여인
잠언 31장 1–31절은 고귀한 성품을 지닌 한 여인을 묘사한다. 그는 남편의 신뢰를 받으며 평생 남편에게 선을 행하는 믿을 만한 아내이다(잠 31:11–12). 그는 매우 부지런하고 활력이 넘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잠 31:13–17). 또한 자신이 하는 거래에서 어떻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고 있으며(잠 31:18),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는 동시에(잠 31:20) 자신의 가계도 잘 돌보고 관리한다(잠 31:21).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남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잠 31:28–31).
잠언 31장은 아마도 고귀한 성품을 지닌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는 훌륭한 기업가의 자질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부지런히 일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며, 거래를 통하여 이익을 얻고, 자신의 가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사회적 책임도 실천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삶의 근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잠언 31장의 여인은 경제적 능력과 근면함, 수익성, 가계관리, 이웃에 대한 책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함께 갖춘 성경적 기업가의 좋은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잠언 31장의 여인은 현대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기업가로서의 여성상과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가정을 돌보는 아내와 어머니인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활용하여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성이다. 그는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고 거래하며, 밭을 살펴보고 구입하고, 자신이 번 것으로 포도원을 일구는 등 생산과 투자에 참여한다(잠 31:16, 18, 24). 이러한 모습은 가정을 돌보면서도 자신의 지식과 재능, 노동과 자본을 활용하여 사업을 계획하고 운영하는 현대의 여성 기업가와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잠언 31장이 제시하는 여성의 가치는 단순히 경제적인 성공이나 많은 일을 수행하는 능력에만 있지 않다. 그는 가족을 돌보고, 남편의 신뢰를 받으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지혜롭게 말하며, 하나님을 경외한다. 따라서 잠언 31장의 여인은 가정과 경제활동 가운데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지혜롭게 사용하면서 가족과 이웃을 돌보고 하나님을 섬기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 준다. 현대의 여성도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전문적인 능력과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여 경제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잠언 31장의 여인은 신앙과 가정, 일과 경제활동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현대 여성에게도 좋은 모범이 될 수 있다.
8. 예수님
기업가로서 예수님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의 짧은 생애와 3년여의 공생애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도전적으로 선포하고 가르치며 확장하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을 계속 말씀하셨다(행 1:1–11).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하였다(행 1:6).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의 사역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그의 부활과 성령의 역사 가운데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되었으며, 다시 그들의 제자들과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그의 지상 생애와 공생애에 한정되지 않고, 그가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 확장되어 가는 사역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기업인들에게도 중요한 원리를 제공한다. 첫째, 기업인은 돈을 주인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24). 돈과 이익은 기업활동에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기업인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 기업인에게는 하나님이 돈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둘째, 기업인은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37). 정직과 신뢰는 고객, 직원, 투자자, 거래 상대방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다. 단기적인 이익을 위하여 신뢰를 잃는 것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공을 위협할 수 있다.
셋째, 기업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관리해야 한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고 그것을 활용하도록 하였으며, 후에 그 결과를 평가하였다(마 25:14–30; 눅 19:11–27). 기업인은 자신이 가진 돈과 노동, 시간과 지식, 재능과 기술을 자신의 절대적인 소유로 생각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원으로 여기고 생산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넷째, 기업인은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이러한 황금률은 고객과 직원을 공정하게 대하고, 거래 상대방을 속이지 않으며, 자신의 경제활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기업윤리의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다.
다섯째, 기업인은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servant leadership).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 기업의 지도자는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원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능력을 개발하며 공동의 목표를 이루도록 돕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기업인은 기업의 성공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따라서 그리스도인 기업인에게 기업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고 부를 축적하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기업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충성스럽게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기업인이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할 수 있다.
9. 예수님의 달란트와 므나 비유에 나오는 종들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누가복음 19장 11–27절의 므나 비유에 나오는 종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맡겨진 자금을 활용하여 열심히 일하고 이익을 얻었다는 점에서 기업가로 볼 수 있다. 성경은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하였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를 받은 첫 번째 종은 그것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 한 달란트를 오늘날의 노동가치로 약 12억 원으로 추산한다면, 그는 약 60억 원에 해당하는 자금을 맡아 그것을 활용하여 약 60억 원에 해당하는 이익을 더 얻은 셈이다. 두 달란트를 받은 두 번째 종도 약 24억 원에 해당하는 자금을 맡아 그것을 활용하여 두 달란트, 곧 24억 원에 해당하는 이익을 더 얻었다.
제 1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주인은 이들에게 어떤 사업을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익을 남긴 두 종이 반드시 동일한 사업을 했다고 볼 필요도 없다.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가지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그것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두 종은 선하고 충성된 기업가와 같이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활용하여 열심히 일하였고, 각각 자신이 받은 것만큼의 이익을 남겼다. 그 결과 주인은 서로 다른 액수를 맡았고 서로 다른 액수의 이익을 남긴 두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였다(마 25:21, 23). 따라서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규모의 자원을 가지고 동일한 액수의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충성스럽고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란트를 남긴 두 종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기업가로서의 중요한 자질은 충성됨, 부지런함, 책임감, 자율적인 의사결정,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다. 주인은 그들에게 자원을 맡겼지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그들의 판단에 맡겼다. 따라서 두 종은 스스로 기회를 찾고 판단하여 행동하며, 맡겨진 자원을 활용하여 이익을 창출하였다. 그들은 실패의 가능성을 두려워하여 자원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회를 추구하고 자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기업가적 자질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단순히 많은 이익을 얻는 능력이 아니라 충성됨이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서로 다른 규모의 자원을 맡았고 서로 다른 액수의 이익을 남겼지만, 주인은 두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였다(마 25:21, 23). 따라서 그리스도인 기업가에게 성공의 기준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자원을 소유하거나 더 많은 이익을 얻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자원과 능력을 얼마나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활용하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0. 바울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자신의 율법적 의로움에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열성적인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신성모독으로 여겼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그들의 신앙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바울은 하늘로부터 비추는 빛 가운데 자신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행 9:1–9; 22:6–11; 26:12–18). 이 사건은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이 박해하던 바로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다(행 9:20).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이 박해를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바울의 삶은 박해자에서 복음의 전파자로, 박해하는 자에서 박해받는 자로 완전히 바뀌었다.
바울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연속되는 실패의 삶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노력은 많은 경우 거부당하였으며, 그가 세운 교회들 역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과 로마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고 투옥되었으며, 그의 사역 기간 중 상당한 시간을 구금과 고난 가운데 보내야 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바울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하나님을 위한 일을 포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난과 박해 때문에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권면하였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상황이 좋든 나쁘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바울 자신의 삶의 태도와도 잘 어울린다.
전통적으로 바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신약성경의 서신은 13권이며, 이는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이 서신들은 처음에는 여러 도시의 교회와 개인들에게 보내졌지만, 후에는 다른 교회들에서도 읽히고 전해지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반대와 박해, 투옥과 실패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사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려움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자신이 세운 교회들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편지를 통하여 가르치고 권면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끈기와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이 그의 사역을 계속 가능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기업가들이 바울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분명한 목표와 사명, 도전정신, 끈기와 인내, 실패를 극복하는 회복력,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 그리고 사람들과 협력하는 리더십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분명했기 때문에 반대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기업가 역시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와 사업의 목적이 분명해야 하며,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과 실패를 만났을 때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다시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방법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상황에 맞게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한 지역에서 복음이 거부되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직접 방문할 수 없을 때에는 편지를 통하여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가르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기업가에게도 변화하는 시장과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한 가지 방법이 실패했을 때 새로운 방법과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중요한 것은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혼자 일하지 않았다. 바나바, 실라, 디모데, 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비롯한 많은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였으며, 사람들을 훈련하고 책임을 맡김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계속되도록 하였다. 기업가 역시 모든 일을 혼자 하려고 하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고, 그들을 신뢰하며, 책임을 위임하고, 다음 세대의 지도자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바울의 성공은 돈이나 사회적 지위로 측정되지 않았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의 삶은 많은 실패와 고난의 연속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수행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기업가가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단순히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이 성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능력과 자원을 충성스럽게 활용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하여 가치 있는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 기업가가 추구해야 할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업가 정신은 단순히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벌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업가에게는 분명한 목표와 비전, 창의적인 사고, 올바른 의사결정, 도전정신,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부지런함과 끈기,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특히 그리스도인 기업가에게 이러한 자질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이 맡기신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청지기 정신에 기초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기업가적 인물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환경에서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하였다. 그들이 활용한 자원도 돈과 토지, 노동력과 같은 물질적인 자원뿐만 아니라 시간과 지식, 지혜와 경험, 재능과 인간관계,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원과 능력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단순히 소유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활용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기업가는 자신이 가진 돈과 재산, 시간과 노동, 지식과 기술, 재능과 창의력을 자신의 절대적인 소유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맡기신 자원이라는 청지기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업가는 이러한 자원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책임도 가지고 있다.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기업가 정신과 청지기직이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기업가의 성공 역시 단순히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기업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필요하지만, 이익 자체가 기업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며, 일자리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 기업가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적인 기업가 정신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원을 믿음과 지혜로 활용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하여 가치 있는 열매를 만들어 내는 청지기적 기업가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제14장 효율성과 형평성
경제학에서의 효율성과 형평성
경제학에서 효율성(efficiency)은 자원을 최적으로 생산하고 배분하는 것과 관련된다. 생산적 효율성(productive efficiency) 또는 경제적 효율성(economic efficiency)은 주어진 양의 투입요소 또는 자원을 사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때 달성된다. 다시 말하면, 한정된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최대한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배분적 효율성(allocative efficiency)은 재화와 서비스가 소비자의 선호에 따라 적절하게 생산되고 배분될 때 달성된다. 이와 관련하여 어느 한 사람의 후생(welfare)을 감소시키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후생(welfare)을 더 이상 증가시킬 수 없는 상태를 파레토 효율성(Pareto efficiency)이라고 한다.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일정한 조건 아래 생산적 효율성과 배분적 효율성이 모두 달성될 수 있다.
반면 형평성(equity)은 사회가 경제적 자원이나 경제활동으로부터 얻는 혜택을 구성원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형평성은 경제적 자원과 소득, 기회와 혜택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얼마나 공정하게 분배되는가를 다룬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제학에서는 형평성(equity)과 공정성(fairness)이 서로 밀접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효율성과 형평성은 항상 함께 달성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완전경쟁시장은 일정한 조건 아래 생산적 효율성과 배분적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사회의 형평성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시장경제는 어떻게 사회의 형평성을 높일 수 있을까? 형평성을 높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더 많은 소득을 얻는 사람들이 누진적 조세제도를 통하여 더 높은 세율의 세금을 부담하고, 정부가 그 세수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함으로써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분배정책은 소득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 전체의 형평성과 후생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효율성과 형평성 사이에는 상충관계(trade-off)가 발생할 수 있다. 셰인 홀(Shane Hall)이 지적하듯이, 고소득자에게 지나치게 높은 세율을 적용하면 더 열심히 일하고 소득을 얻으려는 동기(incentive)나 그에 따른 보상이 감소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노동과 생산이 감소하여 경제적 효율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43] 다시 말하면, 소득을 보다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한 정책이 경우에 따라서는 경제주체들의 노동, 투자 또는 생산에 대한 동기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효율성과 형평성이 반드시 언제나 서로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토르벤 앤더슨(Torben M. Andersen)과 요나스 마이봄(Jonas Maibom)은 한 국가가 기회집합(opportunity set)의 내부에 있는 경우, 즉 경제적 성과의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면서 동시에 소득분배의 측면에서도 불평등한 경우에는 경제적 성과인 효율성과 소득분배의 형평성을 동시에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설명한다.[44] 이러한 경우에는 적절한 제도와 정책을 통하여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면서 동시에 소득분배도 보다 공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효율성과 형평성의 가능한 경계에 가까이 있는 경우에는 소득을 더욱 평등하거나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성과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경제정책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효율성과 형평성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목표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벅(John Buck)은 “시장이 일반적으로 생산물 또는 소득을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취하는 입장으로, 이들은 일반적으로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을 매우 제한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 반면 시장이 생산물 또는 소득을 불공정하게 분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의 재분배를 위하여 정부가 더 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지지하는 입장이다.”라고 설명한다.[45] 다시 말하면, 미국의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이 자원을 비교적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배분할 수 있다고 보고 작은 정부와 제한적인 정부 개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일반적으로 공화당(Republicans)의 경제정책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반면 전통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시장 자체만으로는 소득과 부의 불공평한 분배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고, 조세와 정부정책을 통한 재분배를 포함하여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일반적으로 민주당(Democrats)의 경제정책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성경에서의 효율성과 형평성
출애굽기 18장 13–27절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혼자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재판을 담당하는 것을 보고,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능력 있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 일을 분담하도록 조언하였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혼자 담당하기보다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책임을 나누고 무거운 짐을 함께 담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드로는 출애굽기 18장 21–22절에서 모세에게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고 조언하였다.
이드로의 조언에는 효율적인 조직과 관리의 중요한 원리가 나타나 있다. 모든 의사결정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능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나누어 주며, 중요한 문제와 일상적인 문제를 구분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업과 권한 위임은 모세의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를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적절한 사람을 선택하고, 그들의 능력에 따라 책임과 권한을 맡기며, 서로 협력하여 일을 분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사도행전 6장 1–6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효율적인 분업의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초대교회가 성장하면서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역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여러 필요를 돌보아야 했다. 특히 매일의 구제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빠지게 되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행 6:1). 교회가 성장하면서 사도들이 말씀의 사역과 매일의 구제를 모두 직접 담당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열두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선택하여 이 일을 맡기도록 하였다(행 6:3). 그리고 사도들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하였다(행 6:4). 이렇게 함으로써 매일의 구제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 일에 집중하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의 사역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좋은 방법을 보여 준다. 기도와 말씀의 사역, 그리고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는 모두 교회에 필요한 중요한 사역이다. 그러나 모든 일을 소수의 사람들이 직접 담당하려고 하면 지나친 부담으로 인하여 각각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적절한 사람을 선택하여 책임과 권한을 나누고, 각 사람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행전 6장은 분업과 책임의 위임이 세속적인 조직에서만 필요한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도 필요한 효율적인 관리의 원리임을 보여 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4–31절과 에베소서 4장 1–16절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영적 은사와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구성원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서로 협력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은사를 가지고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듯이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지체는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몸을 이룬다(고전 12:12–27). 또한 이러한 다양한 은사의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다(엡 4:11–12).
바울 자신의 사역에서도 이러한 협력의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혼자서 모든 일을 수행하려 하지 않고 많은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였다. 그는 바나바와 함께 선교사역을 하였고(행 13–15장), 그 후에는 실라와 함께 사역하였으며 디모데도 그의 사역에 합류하였다(행 16–17장). 고린도에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생활하며 일하고 사역하였고(행 18장), 이후의 선교여행에서도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하였다(행 20장 이하). 이처럼 바울은 서로 다른 배경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복음을 여러 지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혼자 담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서로 다른 은사와 능력을 발견하고, 각 사람이 자신의 은사에 적합한 일을 담당하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다양성과 통일성은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성경적인 분업과 협력의 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
2. 형평성
형평성(equity)은 성경에서도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이와 관련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사무엘하 8장 15절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다고 말한다(참조. 대상 18:14).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라고 번역한다. 여기에서 “공의”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체다카’(צְדָקָה, tsedaqah)로, 문맥에 따라 “의,” “공의,” “정의”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46] 특히 ISV(International Standard Version)는 이 단어를 “equity”(형평)로 번역하여,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justice and equity(정의와 형평)”를 행하였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체다카’와 현대 경제학의 형평성(equity)이 완전히 동일한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두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형평을 행하였다는 것은 통치자가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공정하고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행위는 의롭고 공의로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생활에서도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고 경제적 혜택과 부담을 공정하게 나누려는 노력은 성경이 강조하는 의와 공의의 원리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시편 9장 8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체데크’(צֶדֶק, tsedeq)이고, “정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메샤르’(מֵישָׁר, meshar)이다. ‘메샤르’는 “정직”(uprightness), “공정성”(fairness), “형평”(equity), 또는 “평탄함”(evenness)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47] 특히 여러 영어 번역본은 시편 9장 8절의 메샤르를 “equity”(형평)로 번역한다.
‘체데크’와 ‘메샤르’는 완전히 동일한 단어는 아니지만 의미상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편 기자는 이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이 의로울 뿐만 아니라 공정하고 편파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의롭게 다스리시며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는 의와 형평이 함께 이루어지는 통치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 이사야도 이사야 11장 1–5절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이와 비슷한 사상을 보여 준다. 그는 메시아에 대하여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라고 말한다(사 11:4). 여기에서도 “공의”와 함께 사용된 “정직”은 메샤르 계열의 히브리어이며, 영어 번역에서는 “with equity”로 번역되기도 한다. 특별히 이 구절에서 형평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메시아의 통치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형평은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사람들을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고 의롭고 공정하게 판단하며,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제 10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분배에서도 공평과 형평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출애굽기 16장 18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었을 때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거둔 양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각 사람의 필요가 채워졌다. 이러한 만나의 분배는 성경에서의 형평이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동일한 양을 나누어 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필요가 충족되도록 하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나눔은 하나님의 형평이 그의 백성의 경제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는 신명기 15장 7–8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형평은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재산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풍족한 사람이 자신의 자원을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과 나눔으로써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바울은 제 10장에서 살펴본 “평균의 경제”를 강조한다. 현재 자신에게 풍족한 것을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과 나누고, 장차 그들에게 풍족한 것이 자신에게 부족할 때에는 그들이 그것을 다시 나눔으로써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고후 8:14).
바울이 가르치는 평균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똑같이 소유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의 풍족함으로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 줌으로써 서로 사이의 불평등을 줄이고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나눔은 물질적인 부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적인 부와 은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자신에게 풍족한 것을 부족한 사람과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줌으로써 물질적·영적 불평등을 줄여 가는 것이 바울이 가르치는 평균의 중요한 원리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성경에서의 형평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효율성과 형평성의 상충관계
이 장의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효율성과 형평성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상충관계(trade-off)가 있다. 즉,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형평성이 낮아질 수 있으며, 반대로 형평성을 높이거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효율성이 낮아질 수 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incentive)를 잃게 되면 생산성이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자신이 얻은 부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을 경우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incentive)가 약화될 수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 43–47절과 4장 32–35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incentive)가 억제되지 않고 오히려 삶의 고귀한 목표와 목적에 의하여 더욱 강화된다면 효율성과 형평성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유를 강제로 빼앗기거나 나누도록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풍족함을 나누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나눔은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incentive)를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더욱 강화할 수 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음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발적인 나눔과 이웃 사랑은 형평성을 높이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자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려는 동기를 유지하거나 더욱 강화함으로써 효율성과 형평성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성경이 가르치는 효율성과 형평성의 조화는 현대의 자유시장경제에도 중요한 원리를 제시한다. 자유시장경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 창의성과 기업가 정신을 통하여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도록 동기(incentive)를 제공한다. 성경은 이러한 생산적인 노동과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기신 재능과 자원을 부지런하고 충성스럽게 활용하여 열매를 맺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경제적 효율성과 이익의 극대화만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많이 가진 사람은 자신의 풍족함을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성경적 원리가 자유시장경제 안에서 실천된다면, 개인의 소유와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incentive)를 유지하면서도 경제적 약자를 돌보고 불평등을 줄이는 형평성을 함께 추구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이 제시하는 효율성과 형평성의 조화는 효율성을 위하여 이웃을 외면하거나 형평성을 위하여 생산적인 동기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고 그 결과로 얻은 풍족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제 15장: 시장
경제학에서의 시장(市場)
경제학에서 시장(market)이란 구매자와 판매자가 모여 재화와 서비스를 거래하거나 노동을 비롯한 생산요소를 거래하는 곳을 말한다. 생산물시장(product market)은 재화나 서비스를 거래하는 시장이며, 요소시장(factor market)은 노동, 자본, 천연자원, 기업가적 능력과 같은 생산요소를 거래하는 시장이다.
제 9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달리 사유재산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으며, 중앙의 권위가 가격과 거래량을 결정하기보다 시장에서 그것들이 결정되는 시장경제와 양립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에서 주인으로부터 돈을 맡아 그것으로 장사하도록 한 종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마 25; 눅 19). 이 종들은 주인에게 맡겨진 돈을 가지고 당시의 시장에서 여러 가지 경제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예수님의 비유의 주된 목적이 시장경제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비유는 사유재산과 경제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당시의 시장을 자연스러운 경제적 배경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의 시장
히브리어 ‘마아라브’(מַעֲרָב, maʿarav)는 “상품”(merchandise) 또는 “시장”(market)을 의미한다(겔 27:9, 13, 17, 19, 25, 27, 33, 34). 『King James Version』(KJV)은 에스겔 27장 13, 17, 19, 25절에서 이 단어를 “시장”(market)으로 번역하고, 다른 구절들에서는 “상품”(merchandise)으로 번역한다. 반면 『New International Version』(NIV)은 이 단어를 “상품”(wares)으로 번역한다.[48]
히브리어 ‘사하르’(סָחַר, sachar, Strong 5503)에서 파생된 말은 “교역소”(emporium), 추상적으로는 “교역을 통한 이익”(profit from trade), 또는 “무역”(trade), “시장”(mart), “상품”(merchandise) 등의 의미를 가진다(창 23:16; 34:10, 21; 37:28; 42:34; 왕상 10:28; 대하 1:16; 9:14; 시 38:10; 잠 31:14; 사 23:2, 8; 47:15; 렘 14:18; 겔 27:12, 16, 18, 21, 36; 38:13).[49] ‘사하르’(סַחַר, sachar, Strong 5504, 5505)는 “이득”(gain) 또는 “이익”(profit)을 의미하기도 한다(잠 3:14; 31:18; 사 23:18).[50]
구약성경에서 시장(market), 장터(marketplace), 무역(trade), 이득(gain), 그리고 이익(profit)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며 교역을 통하여 이익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이익을 얻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었으며 그렇게 얻은 돈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정직하고 의로운 방법으로 이익을 얻고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였는지에 따라 복을 주시거나 심판하셨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경제적 이익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이익을 얻는 방법과 그것을 사용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시대의 시장은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조직화된 시장경제의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경제적 기능에서는 현대의 시장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매입하기 위하여 에브론과 토지의 가격을 협의하고 은 사백 세겔을 지불하였으며(창 23:10–16), 요셉의 형들은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은 이십에 팔았다(창 37:28). 또한 잠언 31장의 여인은 밭을 살펴보고 그것을 사며 자신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었고(잠 31:16), 자신이 만든 베옷을 팔고 띠를 상인들에게 넘겨주었다(잠 31:24). 이러한 본문들은 구약시대에도 재산과 상품의 매매, 가격의 결정, 생산과 판매를 통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성경은 또한 지역을 넘어 이루어진 국제적인 교역도 보여 준다. 솔로몬 시대에는 다른 나라들과 말과 병거 등을 거래하였으며(왕상 10:28–29), 에스겔 27장은 두로를 중심으로 여러 민족이 은, 철, 주석, 납, 가축, 포도주, 양털과 여러 상품을 거래하는 광범위한 국제무역의 모습을 보여 준다(겔 27:12–25). 따라서 구약의 시장에서도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하고, 상품을 생산하고 교환하며, 지역 간에 자원을 이동시키고, 교역을 통하여 이익을 얻는 시장의 기본적인 기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의 시장은 규모와 거래방식에서는 구약시대의 시장과 크게 다르지만, 사람들의 필요와 자원을 자발적인 교환을 통하여 연결한다는 기본적인 경제적 기능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시장
유대인 상인들은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 예배하기 위하여 온 사람들에게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면서 성전 뜰을 시장 또는 장터처럼 만들었다(요 2:14–16).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 16절에서 상인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시장이나 상업활동 그 자체가 아니었다. 성전과 시장은 서로 다른 목적과 기능을 가진 장소였다. 시장은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사고파는 경제활동의 장소인 반면,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였다. 상인들의 잘못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과 시장의 목적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신약성경이 시장이나 정당한 상업활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기보다, 경제활동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소와 목적에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고린도를 비롯한 이방 도시의 시장에서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가 그렇지 않은 고기와 함께 판매되었다(고전 8; 10:25–26; 롬 14).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서 먹어도 되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언제나 구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25–26절에서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고 권면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우상은 참된 신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졌는지를 일일이 묻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는 로마서 14장 20–21절에서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음식은 먹을 수 있지만, 자신의 먹고 마시는 행위로 인하여 믿음이 약한 형제나 자매가 실족하게 된다면 그들을 위하여 그것을 먹거나 마시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을 시장에서 사고 소비할 수 있는가 하는 개인의 자유만이 아니라, 그 자유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책임 가운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시장에서의 소비활동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권리와 선택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
‘아고라’(ἀγορά, agora)는 본래 “모으다”라는 의미의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의 집회 장소(town meeting place)” 또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resort of the people)”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아고라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누고 상품을 거래하는 장소였다. 헬라어로 ‘아고라’(ἀγορά, agora), 라틴어로 ‘포룸’(forum)이라고 불린 시장은 “많은 고대 도시들, 특히 그리스와 로마의 도시들에 있었던 넓고 개방된 공간으로, 한쪽에는 공공시장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신전, 극장, 주랑, 법정, 목욕탕과 그 밖의 공공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어 전체 광장이 흔히 웅장한 모습을 이루었던 곳”이었다.[51] 헬라어 ‘아고라’(ἀγορά, agora)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나 회중 또는 집회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러한 집회가 열리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시장 또는 장터는 단순히 상품을 사고파는 장소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는 공공의 열린 공간이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시장은 상품을 거래하는 경제적 기능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여러 기능 가운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1) 아이들이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놀던 장소(마 11:16; 눅 7:32);
(2)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고용주를 기다리며, 주로 하루 단위로 자신의 노동을 제공할 조건과 임금을 협의하던 일종의 고대 노동시장과 같은 장소(마 20:1–16);
(3)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지위와 경건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고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던 장소(마 23:3–7; 막 12:38; 눅 11:43, 20:46);
(4) 병든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위하여 데려와지던 곳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요양소나 공공병원과 같은 장소(막 6:56);
(5) 재판에 앞서 예비 심리가 이루어지고, 피고인이 당시 그곳에 있던 관리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을 수 있었던 장소(행 16:19);
(6)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또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던 광장으로서, 일종의 공개 토론장과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장소(행 17:17).[52]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16–17절(참조 눅 7:32–33)에서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장터는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목적으로 모이는 장소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 1–16절에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 나오는 시장은 일자리가 없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나 사업에 노동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고용되기를 기다리던 장소였다. 말하자면 실업자들이 임시 일자리를 구하던 노동시장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오전 9시경 시장에 나가 일할 사람들을 고용하였다. 그는 다시 정오경과 오후 3시경에 시장에 나가 더 많은 일꾼을 고용하였으며, 오후 5시경에도 다시 나가 일꾼들을 고용하였다. 이 이야기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인 오후 6시경이면 하루의 일이 거의 끝나는데도 포도원 주인이 왜 오후 5시에 다시 일꾼들을 고용하였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주인의 관대함과 자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장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일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의 일꾼들을 부르신다.
어떤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신의 은혜와 공의에 따라 대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평함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때때로 공평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먼저 와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은 나중에 와서 짧게 일한 사람들과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을 불공평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먼저 온 일꾼들에게도 그대로 지불하였으며,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선한 뜻에 따라 동일하게 주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으로 끝맺으신다(마 20:16).
이 비유가 천국을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또는 나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자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을 자신의 나라로 부르시며, 먼저 부름받은 사람이나 나중에 부름받은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받아들이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충성스럽고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시장은 오늘날의 사회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5–7절에서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장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또는 사회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리며, 사람들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평가한다. 따라서 시장, 곧 공동체와 사회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 정직하고 신실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우리가 믿는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일하며 거래하는 시장과 같은 일상적인 사회생활 속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시장은 병든 사람들이 치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하여 데려와지고,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찾아오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시장에서 병든 사람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셨으며,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셨다. 마가복음 6장 56절은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시장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만나 고쳐 주셨듯이,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와 사회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위로하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시장은 단순히 경제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이웃의 필요를 발견하고 사랑과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시장은 재판에 앞서 예비 심리가 이루어지고, 고발당한 사람이 당시 그곳에 있던 관리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을 수 있었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16장 19절은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장터는 단순히 상품을 사고파는 경제적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관리들 앞에 끌려가 고발과 심문을 받을 수 있었던 공적인 장소이기도 하였다.
시장은 종교적·철학적 또는 정치적 문제를 자유롭게 논의하고 토론하던 장소로서, 일종의 공개 토론장이자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이러한 시장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사도행전 17장 17절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장은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는 삶의 현장에 비유할 수 있다. 그곳은 우리의 이웃이나 학교, 직장 또는 공동체일 수 있으며, 우리는 그곳에서 아는 사람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권면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시장은 단순히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선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시장은 우리가 재화와 서비스를 사고파는 장소이다. 구매자 또는 소비자로서 우리의 목표는 주어진 예산제약 안에서 자신의 효용, 곧 만족이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지런하면서도 절제된 소비생활을 해야 한다. 판매자 또는 사업가로서 우리의 목표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정직하고 공정하게 사업을 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한,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는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다. 잠언 11장 1절은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말하며, 잠언 20장 23절도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이윤 자체가 아니라 속임수와 불공정한 방법으로 이윤을 얻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마 25:14–30)와 므나 비유(눅 19:11–27)에서 주인에게 맡겨진 돈을 활용하여 이익을 남긴 종들을 칭찬하신다. 물론 이 비유들의 주된 목적은 시장에서의 이윤 추구를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충성스럽고 부지런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그러나 비유에서 종들이 맡겨진 돈을 그대로 보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은 경제생활에서도 우리에게 맡겨진 자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 시장에서 정당하게 사업하여 이윤을 얻는 것은 자신의 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이익을 하나님의 가계와 이웃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도 유익하게 활용될 수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0절에서 제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구매자이든 판매자이든 시장이라는 일상적인 경제생활의 현장에서 작은 일에도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더 큰 일에도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섬길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장에서의 경제활동과 하나님의 사역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시장에서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정직하고 공정하며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청지기직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속의 시장은 현대의 자유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에도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다. 성경은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시장경제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지만,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과 노동을 사용하여 자유롭게 생산하고 거래하며 이익을 얻는 경제활동을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의 선택과 사유재산, 자유로운 거래, 노동과 기업가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 자유시장경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자유시장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일하고 창의적으로 자원을 활용하며 더 나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도록 동기(incentive)를 제공한다. 이러한 시장의 효율성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원을 부지런하고 생산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성경의 청지기 정신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경제활동을 무조건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거짓 저울과 속이는 거래를 금지하고(레 19:35–36; 잠 11:1; 20:23),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지 말며(신 24:14–15),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돌보도록 명령한다(신 15:7–11). 따라서 자유시장은 자유와 이윤만을 추구하는 시장이 아니라 정직, 공정성, 책임과 이웃 사랑이라는 도덕적 원리 안에서 운영되어야 한다. 기업과 개인은 이윤을 추구할 자유를 가지지만, 그 자유를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착취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풍족함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과 나눌 책임도 가지고 있다.
정부의 역할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정부가 시장의 모든 경제활동을 직접 결정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지만, 통치자가 모든 사람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삼하 8:15; 참조. 롬 13:1–7). 따라서 정부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와 시장의 효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정직하고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와 질서를 세우고 사기와 착취와 같은 불의한 경제행위를 막으며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정부의 지나친 개입으로 시장의 자유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투자하려는 동기(incentive)를 약화시키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시장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의와 착취를 방치해서도 안 된다.
성경이 현대 자유시장과 정부에 제시하는 방향은 시장과 정부 가운데 어느 하나가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적절한 역할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 노동과 기업가 정신을 통하여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부를 창출하며, 정부는 정의롭고 공정한 경제질서를 유지하고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시장과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모두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정직하게 일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의 풍족함을 자발적으로 나눔으로써 효율성과 형평성이 함께 이루어지는 경제를 만들어 가는 데 참여해야 한다.
제 16장: 불확실성의 경제학
불확실성(不確實性)하의 의사결정
앞에서 언급했듯이, 경제학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사결정이 항상 확실성(certainty)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로 불확실성(uncertainty)이나 위험(risk) 아래에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경제학에서 위험은 어떤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의미하는 반면, 진정한 의미의 불확실성은 그 발생 가능성을 측정하기 어려운 경우를 말한다.
사실 우리의 삶은 확실하고 안전하다기보다 불확실성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으며,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알 수도 없다. 더욱이 사람이 죽은 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죽은 후에는 영으로 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부활한 영적인 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게 될 것을 믿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으며(눅 23:43),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음을 약속하셨다(요 3:16; 5:24). 또한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고 다시 와서 자신이 있는 곳에 그들도 함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2–3).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불확실성과 위험은 존재하지만,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내일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지만, 궁극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불확실성과 위험 가운데서 경제적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중요한 삶의 토대가 된다.
성경에서의 불확실성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자신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창 2:17).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과 죽음에 대한 경고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 열매를 먹은 결과로 자신과 하와, 그리고 이후의 인류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경고는 들었지만, 죄와 죽음이 실제로 자신의 삶과 인류에게 가져올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아담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하여 자신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며, 그 결과가 이후의 인류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을 미리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면 그의 선택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는 하와가 그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말렸을 것이며, 자신도 그것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을 때 그녀와 함께 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경계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담의 선택은 하나님의 명령과 경고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모든 결과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의사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아는 대홍수가 실제로 일어날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장차 홍수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아직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이었다. 노아는 500세쯤 되었을 때 방주를 짓기 시작하여(창 5:32; 6:10), 600세에 홍수를 맞았으므로(창 7:11), 약 100년 동안 언제 홍수가 일어날지 알지 못한 채 인내하며 방주를 지었다고 볼 수 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노아의 믿음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7절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고 말한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약 한 세기에 걸쳐 인내하며 방주를 준비하였으며, 그 결과 자신과 가족을 구할 수 있었다.
노아의 이야기는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했을 때 믿음이 우리의 의사결정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 준다. 노아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 수 없는 미래를 하나님의 말씀에 맡기고 믿음으로 행동하였다. 이처럼 성경적 믿음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모두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끝까지 인내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민족과 복이라는 세 가지 약속을 주셨다(창 12:1-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이 세 가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처음부터 확실하게 알고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알지 못했으며 때로는 그 약속의 성취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아직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 2절에서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창 15:3). 여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아브라함의 답답함과 의문이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거나 그의 행동이 언제나 완전했다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앞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믿고 따랐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을 잘 보여 준다. 히브리서 11장 8절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을 때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고 말한다(히 11:17).
아브라함이 자신의 고향을 떠난 결정과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한 결정은 모두 미래의 결과를 미리 알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로 가게 될지 알지 못한 채 떠났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상태에서도 이삭을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중요한 의사결정들은 불확실성 아래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믿음이었다.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라합, 사무엘, 다윗을 비롯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미래에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들의 믿음은 미래의 모든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불확실성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떻게 끝날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고, 미래를 모두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확실성이 없는 삶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이론
경제학에서 게임이론(game theory)은 한 개인이나 기업의 의사결정 결과가 다른 상대방의 행동이나 의사결정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상대방이 어떠한 선택을 할지 확실히 알지 못할 때 각 경제주체가 어떻게 전략적으로 행동하고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설명하고 연구한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게임이론의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게임 가운데 하나이다. 이 게임에서는 두 명의 합리적인 경기자(player)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도록 각각 분리된 방에 놓인 상태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의사결정을 내린다. 다시 말하면, 두 경기자(players)는 상대방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각자의 선택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결과들을 고려하여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처럼 각 경기자가 서로 협의하거나 공동으로 전략을 결정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전략을 선택하는 게임을 비협조적 게임(noncooperative game)이라고 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게임이론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의 불확실성하의 의사결정을 게임이론을 사용하여 해석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성경을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논의한 학자들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53] 나는 다음의 몇 가지 성경의 사례들을 내가 직접 작성한 보수표(payoff table)를 사용하여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게임에 대한 보수표(payoff table)를 구성하기 위하여,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이나 명령이 성취되는 경우와 성취되지 않는 경우를 선험적 가정(a priori assumption)으로 설정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이나 명령이 성취되지 않는 경우를 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자신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실 수 있다는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게임이론의 분석을 위하여 아담의 의사결정 시점에서 가능한 경우들을 가정한 것이다.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창세기 2장 16절 하반절–17절에 나타나 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성취되는 경우,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계속 생명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아담의 보수(payoff)는 무한대(+∞), 또는 극히 큰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의 순종을 매우 기뻐하시므로, 하나님의 보수 역시 무한대(+∞), 또는 극히 큰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성취되지 않는 경우, 즉 하나님께서 아담을 죽음으로 벌하지 않으시지만 아담에게 영원한 생명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아담은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므로, 그의 보수(payoff)를 -α₁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 값은 아담의 성향에 따라 어떤 음수에서부터 음의 무한대(-∞)까지 달라질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령이나 약속을 성취할 의도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담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한 것 자체는 기뻐하신다. 따라서 이 경우 하나님의 보수는 +θ₁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어떤 양의 값을 의미한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성취되는 경우, 아담은 반드시 죽게 되어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아담의 보수(payoff)는 매우 큰 음수 또는 음의 무한대(-∞)에 가까운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을 매우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하나님의 보수 역시 음의 무한대(-∞)에 가까운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참조, 창 6:6–7).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성취되지 않는 경우, 즉 하나님께서 아담을 벌하지 않으시지만 아담에게 영원한 생명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어느 정도의 지식을 얻게 되므로, 그의 보수(payoff) α₂는 어떤 양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령이나 약속을 성취할 의도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담의 불순종 자체는 기뻐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이 경우 하나님의 보수 -θ₂는 어떤 음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담은 어떤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위의 보수표에서 볼 수 있듯이,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항상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우월전략(dominant strategy)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결정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지만, 아담은 그 명령을 신뢰하고 따르는 대신 불순종하는 결정을 내렸다. 창세기 3장 6절에서 아담은 하와가 건네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 결과 아담은 그의 아내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창 3:23–24), 생명나무에 접근하여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잃게 되었다(창 3:22–24).
이러한 아담의 선택은 불확실성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모든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함으로써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합리적인 의사결정은 단순히 자신에게 가장 큰 보수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선택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
2. 아브라함과 하나님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게임에서도 나의 선험적 가정(a priori assumption)은 앞의 경우와 동일하다. 즉,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수도 있고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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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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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 |
불성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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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
믿음 |
(+∞, +∞) |
(-α1, +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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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
(-∞, -∞) |
(+α2, -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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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창세기 12장 1–3절에 나타나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경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얻게 되고 큰 민족을 이루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보수(payoff)는 매우 큰 양수 또는 양의 무한대(+∞)에 가까운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순종을 매우 기뻐하시므로, 하나님의 보수 역시 양의 무한대(+∞)에 가까운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경우,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아브라함은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므로, 그의 보수(payoff) -α₁은 아브라함의 성향에 따라 어떤 음수에서부터 음의 무한대(-∞)까지 달라질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할 의도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브라함이 자신의 말씀에 순종한 것 자체는 기뻐하신다. 따라서 이 경우 하나님의 보수 +θ₁은 어떤 양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경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과 큰 민족과 복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며, 그의 보수(payoff)는 매우 큰 음수 또는 음의 무한대(-∞)에 가까운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불순종을 매우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하나님의 보수 역시 음의 무한대(-∞)에 가까운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경우,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잃지 않게 된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날 필요가 없었으며, 고향에 그대로 머물면서 다른 일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아브라함의 보수(payoff) α₂는 어떤 양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할 의도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브라함의 불순종 자체는 기뻐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이 경우 하나님의 보수 -θ₂는 어떤 음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어떤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앞에서 살펴본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보수표에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항상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우월전략(dominant strategy)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결정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났으며(창 12:4; 히 11:8),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믿음으로 행동하였다. 특히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에 관하여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또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고 순종하였다(히 11:17–19).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의 후손들을 큰 민족으로 이루셨으며,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풍성한 복을 베푸셨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미래의 결과를 모두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사결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결정을 내렸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대조를 이룬다.
3. 사람(Person)과 하나님
일반적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게임에서는 앞에서 설정했던 선험적 가정(a priori assumption)을 제거할 수 있다. 즉,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와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게임이론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게 되며, 그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위하여 바친 시간과 삶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바울도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소망이 헛된 것이 된다고 말한다(고전 15:16–19).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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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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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지옥 |
천국/지옥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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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
믿음 |
(+∞, +∞) |
(-α1, +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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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
(-∞, -∞) |
(+α2, -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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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또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경우,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그 사람의 보수(payoff)는 양의 무한대(+∞)이다.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믿음과 순종을 매우 기뻐하시므로, 하나님의 보수 역시 양의 무한대(+∞)에 가까운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예수님(또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경우, 즉 천국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 경우 그 사람은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므로, 그의 보수(payoff) -α₁은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어떤 음수에서부터 음의 무한대(-∞)까지 달라질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할 의도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 자체는 기뻐하신다. 따라서 이 경우 하나님의 보수 +θ₁은 어떤 양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예수님(또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경우,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된다. 따라서 그 사람은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므로 그의 보수(payoff)는 음의 무한대(-∞)에 가까운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불신을 매우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하나님의 보수 역시 음의 무한대(-∞)에 가까운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예수님(또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경우, 그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세속적인 삶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으므로, 그의 보수(payoff) α₂는 어떤 양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할 의도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사람의 불신 자체는 기뻐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이 경우 하나님의 보수 -θ₂는 어떤 음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앞에서 살펴본 아담과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보수표에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항상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우월전략(dominant strategy)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의 결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믿고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확실성 아래에서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믿음과 불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일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입게 되는 최악의 손실은 무엇일까? 그 손실에는 예배와 그 밖의 교회 활동에 사용한 시간과 교회에 드린 헌금 등을 포함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예배와 헌금은 단순한 경제적 비용이나 손실로만 볼 수 없지만, 여기서는 불확실성 아래에서의 선택을 분석하기 위하여 이를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는데 실제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이 입게 되는 최악의 손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한 물질적 손실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죽음과 그에 따른 고통일 것이다. 따라서 두 선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비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선택에서 감수해야 할 수 있는 손실은 제한적인 반면, 믿지 않는 선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확실성 아래에서 최악의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의사결정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순히 천국과 지옥의 가능성을 계산하여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경제적 선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있으며, 이러한 의사결정 분석은 불확실성 가운데 믿음과 불신의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의 차이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과 연관하여 살펴본 불확실성의 경제학과 게임이론은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제시하는가?
첫째, 우리는 불확실성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완전히 알 수 없으며, 자신이 내린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노아와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도 미래의 결과를 모두 알고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의사결정을 하였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직업, 사업, 투자, 결혼, 자녀교육, 건강 등 삶의 중요한 문제에서 미래를 완전히 알지 못한 채 결정을 내려야 한다.
둘째, 불확실성 아래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에는 선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뿐만 아니라 발생할 수 있는 위험과 손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게임이론의 보수표가 보여 주듯이, 각각의 선택에는 서로 다른 결과와 보수(payoff)가 따를 수 있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은 가장 좋은 결과만 기대하기보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여러 결과, 특히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손실도 고려해야 한다.
셋째, 인간의 의사결정은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게임이론이 보여 주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가정과 직장, 기업과 시장, 교회와 사회에서 내가 내린 결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다른 사람들의 결정 또한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져올 결과도 고려해야 한다.
넷째, 성경은 불확실성 속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노아와 아브라함은 미래의 모든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행동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음은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불확실성의 경제학과 게임이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영생과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문제는 경제학이나 게임이론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문제가 참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면, 그것을 자신의 삶과 무관한 문제로 여기기보다는 각각의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불확실성의 경제학은 미래를 모두 알 수 없는 인간에게 완전한 정보가 주어질 때까지 결정을 미루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가능한 결과와 위험을 신중하게 살펴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며, 자신이 믿는 가치와 신앙에 따라 책임 있게 의사결정을 하며 살아갈 것을 제시한다.
제 17장: 환경경제학
환경경제학(environmental economics)은 환경과 관련된 경제적 의사결정을 다루는 경제학의 한 분야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경제가 지구온난화, 온실가스 배출과 각종 오염을 비롯한 여러 환경문제로부터 더욱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면서 환경경제학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환경문제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이나 이윤만을 추구할 때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장들은 많은 양의 화학물질을 강이나 바다에 배출하여 수질을 오염시킬 수 있다. 또한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산림에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나무를 베거나 바다에서 지나치게 많은 물고기를 잡으면 공유자원이 고갈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고 한다. 즉, 일부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공동으로 사용하는 자원을 과도하게 이용함으로써 결국 그 자원이 고갈되는 현상을 말한다.
최근에는 사람들이 환경문제와 사회적 책임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자연환경 및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을 함께 배려한다면 환경문제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기업은 환경과 사회적 책임을 크게 고려하기보다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기업이 단순히 이윤만을 추구하는 데서 벗어나 온실가스 배출과 같은 부정적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ies)를 줄이고 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기업의 목표에 포함시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기업이 사람(people), 즉 사회적 책임과 지구(planet), 즉 환경에 대한 책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 주는 것이 트리플 바텀 라인(triple bottom line, TBL)이다. 트리플 바텀 라인은 기업의 성과를 이윤(profit), 사람(people), 지구(planet)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한다. 즉,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는 동시에 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줄이고 지구를 보호하며, 사회와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트리플 바텀 라인은 기업과 그 종업원들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그 구성원들, 그리고 자연환경에도 유익을 가져다주는 바람직한 기업경영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트리플 바텀 라인(TBL)의 성과는 사회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기업이 추구할 만한 이상적이고 윤리적인 목표이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목표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기업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영리기업보다는 비영리기업에서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소규모 기업은 대기업보다 트리플 바텀 라인의 성과를 추구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생산비용을 낮추어야 하는 반면,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이윤, 사람, 환경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이 현재의 이윤을 어느 정도 줄이는 것을 감수하면서 트리플 바텀 라인의 성과를 추구하기 시작한다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여 더 큰 이윤을 얻을 수도 있다. 환경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소비자들의 신뢰와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의 환경
인간의 번영은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아담과 하와에게 동물과 새와 물고기, 나무와 식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창 1:28–29).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가계인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동물들, 그리고 나무와 식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최초의 사람들에게 그 환경을 돌보고 관리하는 책임을 맡기셨다. 하나님의 본래 창조에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도 노화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포함한 환경을 돌보고 관리하도록 하셨다. 창세기 2장 15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여기서 “지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마르’(שָׁמַר, shamar)는 “지켜보다(watch)” 또는 “보존하다(preserve)”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5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다른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건강하고 깨끗한 환경 속에서 생명을 누리며 번성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셨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계속 관계를 맺으시며 그들을 인도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창조세계와 자연환경을 소중히 여기고 잘 돌보며 관리할 책임을 맡기셨다.
환경 보호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불편을 주는 행동을 삼가게 될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고속도로에 깡통이나 병을 버리거나, 불필요하게 자동차 경적을 울리거나, 밤늦은 시간에 큰 소음을 내는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불편을 끼칠 수 있다. 경제학에서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비용이나 피해를 발생시키는 부정적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ies)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외부효과는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형제자매와 이웃뿐만 아니라 나그네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레 19:18, 34; 마 5:43–44; 22:39; 막 12:31; 눅 6:27, 35; 10:27; 요 13:34; 15:12; 롬 12:10; 13:9–10; 15:2; 갈 5:14; 히 13:1–2; 약 2:8; 벧전 1:22; 4:8; 요일 2:10; 3:11, 14, 23; 4:7, 11, 21).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은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줄이는 출발점이며, 동시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환경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해에 땅을 완전히 쉬게 하심으로써 토지가 회복되고 이후에 더욱 건강하고 생산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5장 1–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곱째 해에는 땅으로 온전히 쉬어 안식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2, 4–5절). 이 안식년에는 사람들이 땅을 경작하지 않더라도 땅에서 저절로 소출이 생길 수 있었으며, 그렇게 난 소출은 종과 품꾼과 거류민뿐만 아니라 가축과 들짐승도 함께 먹을 수 있었다.
이처럼 토지의 안식년 제도는 사람에게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땅 자체에 쉼을 주셨으며, 그 땅에서 나오는 소출을 사람들과 가축과 들짐승이 함께 누리도록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땅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심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35장 33–3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주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땅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33절에서 “더럽히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네프’(חָנֵף, chaneph)는 “더럽히다”(pollute) 또는 “오염시키다”(defil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55] 이 히브리어는 땅과 관련하여 시편 106편 38절, 이사야 24장 5절, 예레미야 3장 1–2절과 9절, 미가 4장 11절에서도 사용된다. 성경에 따르면 땅, 곧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은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더럽혀질 수 있다. 무죄한 피를 흘리는 살인(시 106:38; 민 35:33), 율법을 범하고 율례를 어기며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사 24:5), 음행과 악한 행위(렘 3:1–2), 간음(렘 3:9),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민족을 더럽히려는 행위(미 4:11) 등이 그 예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환경을 더럽히는 것은 단순히 자연을 물리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와 불의한 행동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경에서의 환경에 대한 징벌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7절에서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고 말씀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타락했을 때 인간뿐만 아니라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았으며, 모든 피조물은 노화하고 부패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세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아가는 피조물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으며, 피조세계도 부패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처럼 성경에서 인간의 운명과 자연환경을 포함한 피조세계의 운명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인간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과 다른 피조물에도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환경의 변화는 인간과 자연환경이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24장 1절에서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라고 말한다. 또한 3–5절은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자연환경을 잘 돌보고 관리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의 죄로 인하여 땅과 다른 피조세계도 함께 징벌을 받게 된다. 그것은 땅이나 다른 피조물 자체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과 죄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에서 인간과 자연환경을 포함한 피조세계의 운명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이 살아가는 땅과 다른 피조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대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은 크게 줄어들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800년 이상을 살았다. 아담은 930세, 셋은 912세, 에노스는 905세, 게난은 910세, 마할랄렐은 895세, 야렛은 962세, 므두셀라는 969세, 라멕은 777세까지 살았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숫자를 그들의 실제 수명으로 보지 않고 상징적이거나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900년이 넘는 긴 수명조차 하나님께서 본래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에게 의도하셨던 영원한 생명과 비교하면 이미 크게 줄어든 수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잃고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대홍수 이후에는 인간의 수명이 더욱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 후 땅 위에 인간의 죄악이 더욱 커지고 세상이 부패와 폭력으로 가득 차게 되자(창 6:5, 11),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하기로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6장 3절에서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며 마음에 근심하셨다(창 6:6).
노아는 약 500세에 이르렀을 때 세 아들을 낳았으며(창 5:32), 600세가 되던 해에 대홍수를 맞았다(창 7:6, 11). 따라서 성경의 연대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노아는 약 500세 무렵부터 600세가 되기까지 약 100년에 걸쳐 방주를 준비하고 건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아는 대홍수 이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으며, 950세에 죽었다(창 9:28–29).
그러나 노아 이후 인간의 수명은 점차 감소하여 120년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인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초기 세대의 사람들은 400년 이상을 살았지만, 이후에는 200년대로 줄어들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으며(창 11:32), 아브라함은 175세(창 25:7), 이삭은 180세(창 35:28), 야곱은 147세(창 47:28), 요셉은 110세(창 50:26), 모세는 120세(신 34:7), 여호수아는 110세까지 살았다(삿 2:8). 다윗은 약 70세까지 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시편 90편 10절은 인간의 수명에 대하여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살펴보면, 대홍수 이전 수백 년에 이르던 인간의 수명이 홍수 이후 세대를 거치면서 점차 감소하여 마침내 70–80년 정도에 이르게 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현대에는 생활환경과 영양 상태 및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이 다시 증가하고 있지만, 인간의 평균수명은 아직 90년에 미치지 못하며 120년을 넘게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환경의 회복
환경문제는 가까운 장래에 완전히 해결될 수 있을까? 생태학자들과 환경과학자들이 자연환경을 개선하고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러한 노력만으로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노력은 환경의 파괴와 오염을 줄이고 그 진행을 늦추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지만, 피조세계가 겪고 있는 부패의 문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9–23절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고 말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주의 날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궁극적인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도 현재의 썩어짐과 부패의 지배에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듯이, 피조세계는 지금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지만, 장차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될 것이다.
그때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동물들, 그리고 나무와 식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더 이상 노화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간과 함께 부패와 죽음 아래 놓이게 된 피조세계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마침내 회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환경의 궁극적인 회복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환경문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1–4절과 22장 1–5절에서 새롭게 회복될 세계의 모습을 묘사한다. 새 하늘과 새 땅, 곧 회복된 낙원에는 더 이상 눈물도 고통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한다. 또한 회복된 낙원에는 생명나무가 있으며, 요한계시록 22장 2절은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말한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더 이상 부패와 죽음이나 환경문제를 염려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범죄로 잃어버렸던 낙원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환경문제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다른 피조물들을 배려하고 자연환경을 책임 있게 돌봄으로써 환경문제를 줄이고 그 진행을 늦추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면 본 장에서 살펴본 환경경제학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 우리는 자연환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소중한 자원으로 인식하고 책임 있게 관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듯이(창 2:15), 인간에게 자연환경을 이용할 권한뿐만 아니라 그것을 돌보고 보존할 책임도 맡기셨다. 따라서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경제적 의사결정을 할 때 자신의 이익이나 이윤만을 고려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과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환경오염과 같은 부정적 외부효과는 개인이나 기업이 자신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과 사회에 발생시키는 비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때 나타난다. 따라서 개인과 기업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환경에 불필요한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셋째, 기업은 이윤만을 기업 활동의 유일한 목표로 삼기보다 사람과 환경에 대한 책임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트리플 바텀 라인(TBL)이 제시하듯이, 기업은 이윤(profit)을 창출하면서 사람(people)과 지구(planet)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경영은 단기적으로 추가적인 비용을 발생시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소비자의 신뢰를 얻고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넷째, 환경 보호는 다른 사람과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이웃 사랑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 및 자연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도록 한다. 다른 사람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환경문제를 줄이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인간의 노력만으로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환경 보호의 책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따르면 피조세계의 궁극적인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연환경을 책임 있게 관리하고, 환경오염과 자원의 낭비를 줄이며, 다른 사람들과 다른 피조물들을 배려함으로써 환경문제를 줄이고 그 진행을 늦추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결국 성경의 관점에서 본 환경경제학은 인간에게 자연환경을 단순히 자신의 필요와 이익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창조세계의 일부로 바라볼 것을 제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맡은 청지기로서 경제적 필요와 환경 보호 사이에서 책임 있는 의사결정을 하며, 다른 사람들과 다른 피조물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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