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11, 2026

책_성경에서 경제를 배운다_제4부: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제4부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경제윤리학적 관점


 

 

제 21장: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란 무엇인가?

실제 비지니스 세계의 윤리적 문제

경제학에서 발생하는 여러 윤리적 문제 가운데에는 역선택(adverse selection)과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있다. 역선택은 정보의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상황에서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정보를 정직하게 공개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문제와 관련될 수 있다. 반면 도덕적 해이는 자신의 행동으로 발생하는 위험이나 비용의 전부를 자신이 부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기관이 그 일부를 부담하게 될 때 지나치게 위험하거나 무책임한 행동을 하게 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러한 도덕적 해이는 경우에 따라 자기 절제의 부족이나 지나친 사적 이익의 추구와 결합되어 경제윤리의 문제로 나타날 수 있다.

2007–2009년의 미국의 금융위기는 주택시장의 거품 붕괴뿐만 아니라 금융기관들의 과도한 위험 추구와 잘못된 동기 구조, 그리고 금융시장에서 나타난 여러 비윤리적 행위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상업은행을 비롯한 여러 금융기관들은 주택담보대출과 관련된 주택저당증건(mortgage-backed securities, MBS), 부채담보부증건(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s, CDOs), 주택저당채권담보부증권(collateralized mortgage obligations, CMOs) 등의 복잡한 금융상품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였다.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투자에서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고, 금융기관의 경영진과 직원들은 높은 보너스와 주식 관련 보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투자에 따른 위험의 상당 부분은 금융기관의 고객, 투자자, 주주 그리고 궁극적으로 금융시스템 전체에 전가될 수 있었다.

2007년을 전후하여 미국의 주택시장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2008년 금융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일부 금융기관들은 파산하였고, 다른 금융기관들도 파산의 위험에 직면하였다. 금융시스템의 붕괴와 심각한 경기침체를 막기 위하여 미국 정부는 금융기관들에 대규모 구제 및 자본지원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부 지원에는 납세자의 자금이 투입되었으며,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신용의 흐름을 회복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일부 금융기관에서 경영진과 직원들에게 거액의 보너스가 지급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일어났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을 받으면서도 경영진과 직원들이 높은 보상을 받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정당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자신들이 취한 위험으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그 비용의 일부를 정부와 납세자에게 부담시키면서, 성공했을 때의 이익은 자신들의 높은 보상으로 가져가는 행태는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잘 보여 준다. 이것은 경제활동이 단순히 이익과 손실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정직, 절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직과 같은 경제윤리의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의 특징

성경, 특히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모든 규제와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자신의 삶이 비윤리적이라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방종(self-indulgence)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윤리적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책임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이다.

경제윤리 또는 기업윤리의 관점에서 무엇이 윤리적인 행동이며 무엇이 비윤리적인 행동인가? 가난하거나 부유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 사람이 윤리적인지 비윤리적인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지만 여전히 가난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서도 종업원들을 착취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게으르고 일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가난해질 수도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한 결과 부유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가난 그 자체가 반드시 선한 것도 아니며, 부유함 그 자체가 반드시 악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떠한 방법으로 소득과 부를 얻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O. C. 페럴(O. C. Ferrell), J. 프레드리치(J. Fraedrich), L. 페럴(L. Ferrell)은 윤리적 문제를 판단하기 위한 기본적인 가치로 성실성(integrity), 정직성(honesty), 그리고 공정성(fairness)을 제시한다.[59] 이러한 가치들은 경제활동과 기업 활동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의 가치와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돈을 벌고, 재산을 소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하고, 물건을 사고팔며, 다른 사람들과 경제적 관계를 맺을 때 어떠한 성경적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가?

1.    정직(Honesty)

믿음의 사람들은 경제활동이나 사업을 할 때 고객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3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정직과 공정은 단순한 개인적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경제활동의 중요한 윤리적 원칙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25장 13–16절에서도 경제활동에서의 정직과 공정을 강조하셨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서로 다른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거래의 기준을 조작하여 상대방을 속이는 행위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을 금하셨다.

잠언 13장 11절도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라고 말한다. 부정직한 방법으로 쉽게 얻은 재물보다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을 통하여 조금씩 축적한 재물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이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오래된 격언도 이러한 경제윤리의 중요성을 잘 표현한다. 사업에서 정직은 단지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신뢰를 형성하는 중요한 자산이 된다. 고객들이 어떤 사업가가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그 사람과 계속 거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그를 소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직과 공정은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가치인 동시에 지속적인 경제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2.    성실성(Integrity)

경제윤리는 또한 굽은 마음이나 부정직함이 아니라 성실성(integrity)을 요구한다. 잠언 11장 3절은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성실성은 정직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인도하는 도덕적 기준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마음과 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의 패역과 부정직은 결국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잠언 19장 1절도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사실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부정직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실성은 정직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패역함이나 굽은 행동은 부정직과 연결된다.

경제윤리에서 성실성이란 단순히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다른 사람이 보고 있든 보지 않든 동일한 도덕적 기준을 지키며,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자신의 원칙을 쉽게 바꾸지 않는 올곧은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경제활동에서도 이러한 성실성을 유지해야 하며,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3.    공정성 또는 공평성(Fairness or Impartiality)

공정성(fairness) 또는 공평성(impartiality)은 정직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모세는 신명기 10장 17절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며 뇌물에 의하여 자신의 판단을 바꾸지 않으신다. 따라서 공정성과 공평성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윤리적 원칙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행동한다면 뇌물을 받거나 주지 않으며, 특정한 사람에게 부당한 특혜를 베풀지도 않는다. 개인적인 친분이나 사회적 지위,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거래 상대방이나 종업원을 차별해서도 안 된다. 경제활동에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며 이해관계자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경제윤리의 중요한 요소이다.

바울도 로마서 2장 11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공평하게 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도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에서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공정성과 공평성은 단순히 사업상의 좋은 정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경제윤리의 원칙이다..

4.    겸손(Humility)

건전한 기업윤리와 경제윤리를 위해서는 교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사업주나 기업가는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내세우기보다 종업원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겸손한 자세로 대해야 한다. 고용주가 종업원들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대할 때 종업원들도 고용주를 신뢰하고 존중하게 되며, 자신의 일을 더욱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겸손은 개인의 신앙적 덕목일 뿐만 아니라 기업 안에서 상호 존중과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경제윤리의 원칙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러한 겸손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삶의 자세로 가르친다. 야고보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권면하며(약 4:10), 베드로도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한다(벧전 5:5). 예수님도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4:11). 이 말씀들은 자신의 지위나 능력을 내세워 스스로를 높이려는 교만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겸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삶의 자세임을 보여 준다.

예수님 자신은 이러한 겸손의 가장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셨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으며,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겸손을 설명하면서, 그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한다(빌 2:7–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

예수님의 삶은 참된 겸손이 단순히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와 권리를 앞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경제활동과 기업 활동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사업주와 기업가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과 성공을 자랑하기보다 종업원과 고객, 거래 상대방을 존중하고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종업원 역시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동료들을 존중해야 한다. 이처럼 겸손은 기업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이 경제활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게 하는 중요한 경제윤리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5.    검소함(Modesty)

경제윤리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이 아니라 검소한 삶을 요구한다. 잠언 15장 16절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한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사치스럽게 살려는 욕망이 삶을 지배한다면 여러 가지 경제적·윤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기업이나 경제활동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호화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의 소득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면 빚을 지게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얻으려다가 부정직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의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소득과 형편에 맞게 생활하고 지나친 소비욕을 절제하는 것은 개인의 재정관리뿐만 아니라 경제윤리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권면한다. 여기에서 육체의 욕망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한 욕망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검소함은 단순히 돈을 적게 쓰거나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별하고,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에 지배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자신의 만족과 과시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검소함과 절제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이다..

6.    탐욕의 절제(Not Too Much Greed)

어느 정도 더 나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이며, 때로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욕구가 지나쳐 탐욕(greed)이 되면 사람을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이끌 수 있다. 잠언 28장 25절은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라고 말한다. 탐욕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

전도서 5장 10절도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탐욕은 쉽게 만족되지 않는다. 더 많은 돈과 재산을 얻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면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일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다. 돈을 버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삶의 더 중요한 가치를 소홀히 할 수도 있다.

탐욕은 또한 사람을 뇌물이나 부당한 이익의 유혹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잠언 15장 27절은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라고 말한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이 정직과 공정성보다 앞서게 되면 사람은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거나 뇌물을 주고받는 것과 같은 비윤리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기 쉽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재물의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의 삶과 가치를 판단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려는 건전한 욕구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돈과 재물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탐욕은 경계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재물을 소유하되 재물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7.    근면(Diligence)

경제윤리는 게으름이 아니라 근면을 요구한다. 잠언 12장 24절은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라고 말한다. 또한 잠언 13장 4절은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말씀들은 단순히 부지런한 사람이 반드시 부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근면한 태도가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임을 보여 준다.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권면한다. 여기에서 “더욱 힘써”라는 표현은 신앙생활에서도 적극적인 노력과 부지런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근면은 경제생활에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도 필요한 중요한 자세이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가난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도 여러 가지 경제적·사회적 상황으로 인하여 가난할 수 있다. 그러나 일할 능력과 기회가 있음에도 게으름 때문에 가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태도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수행해야 한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이러한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한 달란트를 위탁받은 종은 주인이 맡긴 재산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땅에 감추어 두었다. 주인은 돌아와서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적어도 자신의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었어야 했다고 말한다(마 25:26–27). 이 비유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에 대한 충성과 책임에 있지만, 경제윤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준다. 자신에게 위탁된 재산이나 자원을 아무런 노력 없이 방치하는 것은 책임 있는 청지기의 태도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시간, 재능, 재산과 기회를 게으르게 방치하지 않고 근면하고 책임 있게 관리해야 한다.

8.    신뢰성 또는 신실함(Trustworthiness or Faithfulness)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신뢰할 수 없고 신실하지 못한 태도가 아니라 신뢰성과 신실함을 요구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0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신실함이 재산이나 책임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작은 일과 적은 재산을 맡았을 때 신실한 사람은 더 큰 일과 많은 재산을 맡았을 때에도 신실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생활에서의 신뢰성과 신실함은 일상적인 작은 거래와 작은 책임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맡은 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위탁받아 관리하는 청지기를 의미한다.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자격 가운데 하나는 자신에게 위탁된 것을 주인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관리하여 주인의 신뢰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재산과 자원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재능, 능력과 기회도 하나님께 위탁받은 청지기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위탁받은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자신의 것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뢰할 수 있고 신실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뢰성과 신실함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기업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청지기의 책임이며,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9.    너그러움(Generosity)

마지못해 베푸는 태도가 아니라 기꺼이 나누고 베푸는 너그러움(generosity)도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에 필요한 중요한 성품이다. 너그러운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물과 자원을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필요도 생각한다. 이러한 너그러운 마음은 기업 활동에서도 종업원과 고객, 거래 상대방과 이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고 그들의 형편과 유익을 함께 고려하도록 한다. 따라서 너그러움은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과 기업 활동에서 나타나야 할 중요한 윤리적 태도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6–7절에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는 행위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 베푸는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나누는 것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너그러움은 단순히 많은 돈을 주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위탁된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은 것 가운데서 나눌 수 있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신의 형편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재물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자발적인 너그러움은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한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으며(요 8:32), 또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36).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무런 윤리적 한계도 없는 무제한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거나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2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계속해서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분명한 윤리적 한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그 자유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비윤리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에는 일정한 윤리적 한계가 있다. 우리의 행동이 그 한계 안에 있을 때에는 윤리적이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면 비윤리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단순히 “내가 이것을 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만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가, 아니면 해를 끼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둘째, 내가 어떤 것의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돈, 재산, 소비, 쾌락이나 다른 욕망이 나를 지배한다면, 비록 어떤 행동 자체가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그것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유익한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에도 지배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서 이 원리를 다시 강조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고린도전서 6장 12절의 “유익함”이라는 기준에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이라는 기준이 더해진다. 이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경제적 의사결정을 할 때에도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결정이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도 함께 추구할 때 온전해진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JOY(조이)라는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JOY는 Jesus, Others, You의 첫 글자를 딴 이름으로,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잘 보여 준다. 첫째는 예수님(Jesus), 둘째는 다른 사람들(Others),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You)이다. 이러한 순서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생각하고, 그다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을 그 뒤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가르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중심적인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책임 있는 자유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행사할 때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8장 9절에서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이어서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는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말한다. 바울에게는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할 자유가 있는가 하는 것보다 그 자유의 행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3절에서도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믿음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기 제한은 자유의 상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행동 전반에 관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에도 적용할 수 있다. 경제생활은 우리가 매일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사고팔 것인지, 어떻게 돈을 벌고 사용할 것인지, 종업원과 고객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자신의 경제적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행사할 것인지와 같은 결정에서도 자신의 이익과 권리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경제적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자유의 한계는 단순히 “이것이 합법적인가?” 또는 “내게 이것을 할 권리가 있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가?”,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가?”라는 질문에 의해서도 결정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단순히 법을 지키거나 경제적 이익을 얻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삶의 원칙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적인 경제생활과 기업 활동에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공정하고 겸손해야 하고,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절제하며, 자신에게 위탁된 일과 재산을 근면하고 신실하게 관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기꺼이 나누는 너그러움도 필요하다.

특히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기업인은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기업 활동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종업원과 고객, 거래 상대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웃으로 존중하며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자유 역시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경제적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지,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지, 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는 말씀을 경제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경제활동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제 22장:    다양한 관계에서의 경제윤리

성경에 나타난 개인의 경제윤리

제2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각 개인은 정직하고 의로우며, 공정하고, 검소하고, 책망할 것이 없으며, 지나치게 탐욕스럽지 않고,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근면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신실해야 한다. 이러한 덕목들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에서도 실천되어야 할 중요한 윤리적 원칙들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원칙들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여러 경제적 관계에서 어떠한 경제윤리를 실천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잘못된 풍조와 관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며(고전 6:9–10),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갈 5:19–21). 바울은 또한 탐욕을 우상 숭배와 연결하면서 그러한 삶을 사는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경고한다(엡 5: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도 세상의 가치와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도 바로 이러한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은 경제적 의사결정을 할 때 세상이 일반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합당한지를 분별해야 한다. 이러한 성경적 원칙은 개인의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고용주와 종업원, 판매자와 구매자, 채권자와 채무자 등 다른 사람들과 맺는 다양한 경제적 관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나 다툼이 발생했을 때 서로 소송하는 것을 피하도록 권면한다(고전 6:1–6).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7절에서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한다. 바울의 관심은 단순히 법적인 소송 절차 자체를 금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와 경제적 이익을 끝까지 주장함으로써 서로 다투고 공동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 때로는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양보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화해와 사랑을 위하여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경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활동과 그 원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가계 안에는 개인과 가정, 교회와 같은 여러 단위가 있으며, 각각의 구성원과 공동체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원칙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각 개인과 공동체의 경제윤리도 세상의 가치나 자신의 경제적 이익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하나님의 경제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그의 뜻과 원칙을 일상적인 경제생활과 인간관계 속에 실천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가정의 경제윤리

1.    남편과 아내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3–4절에서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3–4절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남편과 아내는 상대방에게 먼저 의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기보다 각자 자신의 의무를 먼저 다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2–23절과 25절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1–33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인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 비유한다. 바울에 따르면, 아내는 주께 복종하듯 자신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의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현대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권리만을 주장하기보다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부관계는 어느 한쪽이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다른 쪽을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책임을 다하는 관계이다.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엡 5:22–25). 또한 남편과 아내는 가정의 경제생활에서도 서로 정직하고 신실해야 하며, 소득과 지출, 저축과 투자, 부채와 재산관리와 같은 중요한 경제적 문제를 함께 의논하고 책임 있게 결정해야 한다. 어느 한쪽이 자신의 욕망과 이익만을 위하여 가정의 재산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가족 전체의 필요와 유익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현대 가정의 경제윤리는 부부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가정과 재산을 함께 책임 있게 관리하는 청지기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2.    부모와 자녀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 자녀와 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0–21절에서도 자녀와 부모에게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라고 권면한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는 인간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서로 상응한다. 에베소서 6장 1–4절과 골로새서 3장 20–21절에 나타난 부모에 대한 자녀의 윤리적 의무는 바울 자신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20장 12절의 계명에 근거한다(신 5:16 참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장 1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하셨다. 에베소서 6장 3절 상반절의 “네가 잘되고”라는 표현은 질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하고, 하반절의 “땅에서 장수하리라”라는 표현은 양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한다.[60] 여기에서 “땅”은 “약속의 땅”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땅도 가리키며,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출애굽기 20장 12절(신 5:16)이 부모에 대한 자녀의 윤리적 의무를 말씀한다면,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4절(골 3:20–21)에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윤리적 의무도 함께 다룬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위탁하신 존재이다.

현대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는 서로에 대한 권리만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의무와 책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존중하며 그들의 올바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하고, 부모는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자녀는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위탁하신 존재이므로, 부모는 사랑과 인내로 자녀를 양육하고 올바른 신앙과 가치관을 가르쳐야 한다.

경제생활에서도 부모와 자녀에게는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필요한 의식주와 교육을 제공할 책임이 있으며, 동시에 자녀가 돈과 재산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관리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녀에게 무조건 많은 것을 제공하는 것보다 근면, 절제, 저축, 나눔과 책임 있는 소비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도 부모의 희생과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며, 성장한 후에는 필요에 따라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책임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현대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의 경제윤리는 서로를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존재로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위탁하신 책임을 사랑과 신실함으로 수행하는 데 기초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경제윤리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4절 하반절–27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의 윤리, 곧 교회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어떤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의 잘못을 찾아내려고 한다.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생길 수도 있으며, 때로는 교인들 사이의 분쟁을 법정으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이 한 그리스도의 몸이며, 동일한 몸에 속한 각각의 지체라고 가르친다.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같은 몸에 속한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전 12:26). 따라서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의 성공과 기쁨을 시기해서도 안 된다. 믿음의 사람들은 서로 돌보고 서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므로 그들 사이에 분열과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서로 사랑하고 돌보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을 이루어 가야 한다.

현재의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을 독립된 개인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모두 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인들 사이에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 직업과 교육 수준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이 차별이나 분열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인이 있다면 교회 공동체는 그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해야 하며, 다른 교인이 성공하거나 복을 받을 때에는 시기하기보다 함께 기뻐해야 한다.

교회의 재정과 재산을 관리하는 데에도 이러한 경제윤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의 헌금과 재산은 특정한 개인이나 지도자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교회에 위탁된 것이므로 정직하고 투명하며 책임 있게 관리되어야 한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산을 늘리는 데에만 관심을 두기보다 복음 전도와 교육, 구제와 선교,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교인과 이웃을 돕는 일에도 재정을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교회에서 경제윤리는 한 몸에 속한 지체들이 서로 돌보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탁하신 재정과 자원을 공동체와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신실하게 사용하는 데서 나타나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사회의 경제윤리

바울은 로마서 12장 14–21절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사회에서 실천해야 할 윤리를 설명한다. 첫째,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한다(롬 12:14).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상응한다(마 5:44). 둘째,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한다(롬 12:15). 여기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우는 자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고 말한다(롬 12:16a). 믿음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넷째,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라고 말한다(롬 12:16b).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친히 보여 주신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빌 2:5–8). 그리스도인도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자랑하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기보다 낮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말한다(롬 12:16c).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섯째,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한다(롬 12:17; 벧전 3:9 참조). 잠언 17장 13절도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악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 어긋나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르고 본받는 삶이다. 일곱째,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한다(롬 12:18). 믿음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가능한 한 평화롭게 살아가야 한다. 그들과 화목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복음을 보여 주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여덟째,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한다(롬 12:19). 이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혜이다.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아 갈등이 계속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최종적인 판단과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아홉째,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말한다(롬 12:20; 잠 25:21–22). 이것은 원수까지도 품을 수 있는 사랑의 윤리이다. 그리스도인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을 베풀 때, 그러한 선한 행동은 악을 행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열째,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한다(롬 12:21).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때, 그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가계가 이 땅에서 확장되어 간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직장과 사업체, 시장과 지역사회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과 경제적 형편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자신의 신앙과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들과 화목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어려움에 함께하고, 사회적 지위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특히 경제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경제적 결정이 다른 사람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경쟁 가운데서도 정직과 공정성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지 않으며, 갈등이 생겼을 때 악을 악으로 갚거나 보복하기보다 선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위탁된 재물과 자원을 통하여 필요한 도움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 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따라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는 바울의 권면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윤리적 원칙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에서 정직과 공정, 사랑과 화목, 나눔과 선행을 실천할 때, 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사회에 나타나며 하나님의 가계가 확장되어 갈 수 있다.

1.    이웃과의 관계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후반부, 곧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이웃과의 관계 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원리를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명령하셨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약성경에서도 중요한 중심 주제가 된다(마 5:43; 22:39). 예수님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웃 사랑의 범위를 원수에게까지 확대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4).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거나 자신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이웃과 올바른 윤리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원리이다.

2.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

그리스도인이 판매자의 입장에 있을 때에는 정직해야 하며, 공정하고 정확한 저울이나 측정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어떤 판매자들은 단기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하여 부정확한 저울을 사용하거나 상품의 품질이나 가격에 관한 정보를 사실과 다르게 제공하여 고객을 속이려고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구매자들이 판매자의 부정직함을 알게 되고 판매자는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잠언 11장 1절은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라고 말하며, 잠언 20장 23절도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직성은 판매자에게만 요구되는 경제윤리가 아니다. 구매자도 판매자를 정직하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구매자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받은 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상품에 문제가 없는 데도 허위로 불만을 제기하여 환불이나 보상을 요구하거나 판매자의 실수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한 계약이나 약속에 따라 지불해야 할 금액을 고의로 지불하지 않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가격을 낮추려고 하는 것도 정직한 구매자의 태도가 아니다. 판매자가 구매자를 속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구매자도 판매자를 속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경적 경제윤리는 거래의 어느 한쪽에만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에게 정직성과 공정성을 요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시에 판매자이면서 구매자이기도 하다. 생산물 시장(product market)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노동시장(labor market)에서는 자신의 노동을 판매하는 판매자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여 소득을 얻고, 그렇게 얻은 소득으로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며 생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판매자의 위치에 있든 구매자의 위치에 있든 상대방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고 공정하게 거래해야 한다. 이러한 상호적인 정직성과 신뢰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건전한 경제적 관계를 형성한다.

3.    고용주와 종업원의 관계

신명기 24장 14–15절은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3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고용주에게 품꾼의 임금을 부당하게 미루지 말고 제때에 지급하라고 명령하셨다. 당시의 가난한 품꾼들은 하루의 품삯으로 그날의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임금의 지급이 늦어지면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직접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신명기와 레위기의 이러한 명령은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제때에 지급하는 것이 고용주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경제윤리임을 보여 준다.

오늘날에도 일부 고용주들은 종업원들에게 법정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하거나 정당한 임금의 지급을 지연함으로써 종업원들을 착취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는 고용주와 종업원의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계약이나 하도급 관계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중소기업이 계약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미 공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이 대금 지급을 장기간 미루거나 90일 또는 120일 후에 지급되는 어음과 같은 결제수단을 사용한다면, 자금력이 약한 중소기업은 심각한 재정적 부담을 질 수 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 대학에서도 시간강사나 겸임교수의 보수를 늦게 지급하여 강의가 끝난 후 한 달 이상 지나서야 지급하는 경우가 있다. 신명기 24장 15절과 레위기 19장 13절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노동을 제공한 사람이 그 대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당한 이유 없이 지급을 지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고용주가 종업원의 노동을 통하여 유익을 얻었다면 그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약속한 때에 지급해야 한다. 따라서 임금과 거래대금을 공정하고 제때에 지급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고용주와 기업이 지켜야 할 중요한 성경적 경제윤리의 원칙이다.

정부는 노동시장에서 근로자, 곧 노동의 판매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한다. 미국의 연방 최저임금은 2009년 7월부터 현재까지 시간당 7.25달러이지만, 일부 주와 시 및 카운티에서는 이보다 높은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있다. 2009년 이후 한 번도 인상되지 않은 시간당 7.25달러의 연방 최저임금은 오늘날 젊은 비숙련 근로자들에게 과연 공정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이 현재의 연방 최저임금인 시간당 7.25달러를 받으면서 일주일에 40시간, 일 년에 52주를 일한다면 세금을 공제하기 전 연간 소득은 약 15,000달러(2천만 원 상당)이다.

시간당 7.25달러의 최저임금은 다소 낮아 보이지만, 많은 고용주들은 젊은 비숙련 근로자들에게 이 정도의 최저임금조차 지급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에 정착하기 위하여 시간당 3–4달러의 낮은 임금에도 일하려는 취업 자격이 없는 불법체류 이민 노동자들을 고용하려고 한다. 이것 역시 고용주의 또 다른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랍비 마이클 노프(Michael Knopf)는 레위기 19장 16절을 “네 이웃의 피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지 말라”(Do not profit by the blood of your fellow)라고 번역한다.[61] 많은 경제학자들은 노동시장의 최저임금을 포함한 정부의 가격통제가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효과를 더 많이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웃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풍요를 그들과 기꺼이 나누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주인과 종 또는 노예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오늘날 사회의 고용주와 종업원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 5절과 9절에서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말한다. 또한 골로새서 3장 22절과 4장 1절에서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인종, 성별, 교육 수준, 사회적 계층 또는 민족적 배경 등의 차이로 인하여 여러 형태의 차별이 존재한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주인이든 종이나 노예이든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권면한다. 바울은 당시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존재했던 노예제도 또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일시적인 사회적 상황이나 환경으로 보았다.[62]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선언한다. 바울은 믿음이 온 후에는 우리가 더 이상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않으며(갈 3:2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갈 3:26), 따라서 이러한 구별을 넘어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한다(갈 3: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차이에 관계없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63] 

성경에 나타난 국가의 경제윤리

바울은 로마서 13장 1절과 6–7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한다. 정부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그 권세를 존중해야 한다.[64] 또한 국민은 국가의 시민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 exousia)이다. 이 단어는 ‘~로부터, ~밖으로’를 뜻하는 ‘엑스’(ἐξ, ex)와 ‘존재, 실체 또는 본질’을 뜻하는 ‘우시아’(οὐσία, ousia)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권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국가의 권세와 통치자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통치자는 권한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권한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의무도 가진다.

정부나 통치자는 자신에게 권세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국가와 국민을 다스려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부나 통치자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의 다스림과 관리의 원리를 실천해야 한다. 만일 통치자가 국가와 국민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국민에게 잘못을 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의 경제윤리는 개인의 삶에만 국한되지 않고 가정과 교회, 사회와 국가, 그리고 다양한 경제적 관계에까지 적용된다. 경제활동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개인으로서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동시에 가정의 구성원이며, 교회의 일원이고, 사회와 국가의 시민이다. 또한 생산물 시장에서는 판매자 또는 구매자가 되고, 노동시장에서는 고용주 또는 종업원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이러한 모든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하며, 교회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를 돌보고 존중해야 한다.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사회적·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며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판매자와 구매자는 서로를 속이지 않고 정직하고 공정하게 거래해야 하며, 고용주는 종업원의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정당하고 제때에 지급해야 한다. 종업원 역시 고용주에게 성실하고 신실하게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또한 국민은 국가의 정당한 권세를 존중하고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정부와 통치자는 그 권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기억하고 공의와 공평으로 국민을 다스려야 한다.

이러한 모든 관계를 관통하는 성경적 경제윤리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의사결정은 단순히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이익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결정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다른 사람에게 공정한가?”, “나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약점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이 결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경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경제적 단위가 아니다. 모두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위탁된 재능과 시간, 노동과 소득, 재산과 경제적 기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경제윤리란 경제활동을 신앙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제적 관계와 의사결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가계가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세워지고 확장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제 23장:    자본주의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사유재산권

사유재산권은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사회주의의 정부 소유 및 공산주의의 공동 소유와 구별된다. 사회주의에서는 주요 생산수단을 정부 또는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반면, 공산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 구성원 전체의 공동 소유를 지향한다.

구약성경에서도 사유재산권은 인정되었다. 물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소유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소유권이며, 궁극적인 소유권은 하나님께 속한다. 이러한 사유재산권은 신약성경에서도 계속 인정되었다.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생활하였으며, 사도행전 2장 43–47절과 4장 32–35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의 소유를 공동체에 내놓아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

이러한 공생주의(Commonism) 아래에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사유재산권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유재산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신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그것을 공동체의 필요를 위하여 사용하고 서로 나누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의 경제체제인 공생주의는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체제가 아니라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면서 자발적인 나눔을 실천한 것으로서, 사유재산권을 기본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의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장에서의 분권화된 의사결정

자본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시장에서의 분권화된 의사결정이다.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과 거래량을 결정하는 것은 중앙 권력이 아니라 시장이다. 성경은 시장과 시장의 기능을 부정하지 않는다. 판매자들은 시장에서 자신들의 상품을 판매하고, 구매자들은 시장에서 필요한 상품을 구매한다.

분권화된 의사결정이란 정부나 중앙기관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누구에게 얼마의 가격으로 판매할 것인지를 일일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과 기업이 각자의 상황과 판단에 따라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자는 자신의 소득과 필요, 선호를 고려하여 무엇을 얼마나 구매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생산자는 생산비용과 예상되는 이익, 소비자의 수요 등을 고려하여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판매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노동자도 자신의 노동을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제공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기업은 필요한 노동과 자본을 얼마나 고용하고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수많은 경제주체들이 각자 의사결정을 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의사결정은 시장의 가격을 통하여 서로 연결된다. 어떤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다른 조건이 같을 경우 가격이 상승하고, 이는 생산자에게 생산을 늘리라는 신호가 된다. 반대로 수요가 감소하면 가격이 하락하여 생산을 줄이도록 하는 신호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시장가격은 단순히 상품의 값을 나타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비자의 필요와 선호, 상품의 희소성, 그리고 생산비용 등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가격기구(price mechanism)를 통하여 제한된 자원이 다양한 용도 사이에 배분된다.

그러므로 시장에서의 분권화된 의사결정은 경제적 자유와 함께 책임을 수반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판매자와 구매자, 고용주와 종업원 등 각 경제주체는 자신의 의사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성경적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의사결정도 정직과 공정, 이웃 사랑과 청지기적 책임이라는 하나님의 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본주의에서의 기업의 동기

생산자나 판매자는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반면, 구매자는 자신의 효용(utility), 곧 만족이나 행복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판매자가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거짓말, 속임수, 사기 등 비윤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불법적인 행위에까지 이를 수 있다.

최근 기업들은 환경 문제, 곧 지구온난화, 오염 감소, 친환경 에너지 등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기업이 이윤(profit)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people)과 지구환경(planet)도 함께 고려하는 트리플 바텀라인(Triple Bottom Line)을 추구하는 것은 기업 자신과 종업원들에게뿐만 아니라 사회와 그 구성원들, 그리고 환경에도 유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바람직한 경영방식이 될 수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기업은 이윤의 극대화만을 목표로 삼기보다 오염물질과 온실가스 배출 등 부정적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ies)를 줄여 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기업의 목표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업의 경영방식은 기업의 경제적 성과와 함께 사람과 환경에 대한 책임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자본주의의 윤리적 문제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불평등이다. 부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으며 소득에도 차이가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을 장려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으며, 그 결과 소득 불평등 또는 부의 불평등이 발생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거나 그 밖의 불법적인 행위를 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기술이나 재능이 부족하거나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기술과 재능이 뛰어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자신이 축적한 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훨씬 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탐욕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탐욕을 자극할 수 있다. 적절한 수준의 이익 추구와 경제적 욕구는 경제성장의 동기가 될 수 있지만, 지나친 탐욕은 기업과 기업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지나친 탐욕은 사람들을 부정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이용하도록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는 또한 기업들이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재화와 서비스를 과도하게 생산할 경우 환경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오늘날 사회는 온실가스와 각종 오염물질의 배출 등으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이 이윤만을 추구하면서 생산활동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무시한다면, 그 경제활동은 사회 전체에 상당한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도 가운데 하나가 십일조이다. 십일조는 기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가난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돕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원리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풍요를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어야 함을 보여 준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정부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재분배함으로써 이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정부는 조세와 소득재분배 정책을 통하여 지나친 소득 불평등이나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책은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 원리에만 의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어느 정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과 생산량이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결정되는 시장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상인이나 판매자가 저울이나 상품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고 공정하게 거래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고용주는 종업원들의 필요와 어려운 형편을 알고 그들의 처지를 이용하여 부당하게 착취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나 부가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 결과 돈과 부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24). 또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말한다(딤전 6:10).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사랑하거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이다. 돈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돈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여러 가지 문제에 빠질 수 있다. 돈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얻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부정직하거나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거나 심지어 불법적인 일에까지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 노엘(Edd Noell)이 지적하듯이, 자본주의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와 양립할 수 있다.[65]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가 올바르게 실천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우선순위를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정직하고 근면하며 지나치게 탐욕스럽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그들을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사유재산권과 시장에서의 분권화된 의사결정,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이윤 추구를 기본적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제도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촉진하고 경제성장의 동기를 제공할 수 있지만, 동시에 지나친 탐욕과 소득 및 부의 불평등, 근로자의 착취, 불공정한 거래, 환경오염과 같은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 자체가 이러한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가치와 윤리적 원칙에 따라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 자유를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유재산권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주어진 소유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과 소득, 재능과 노동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아야 한다. 돈과 부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며, 정직하고 근면하며 지나친 탐욕을 절제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판매자는 구매자를 속이지 말아야 하고, 구매자도 판매자를 정직하게 대해야 하며, 고용주는 종업원을 착취하지 말고 그들의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기업 역시 이윤만을 추구하기보다 사람과 환경에 대한 책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더 큰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성경은 부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지만,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면서 자신의 부만을 축적하는 삶을 경계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셨다면 그것을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 어려운 이웃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경제적 성공의 기준은 단순히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신실하게 관리하고 사용했는가?”가 되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시장경제의 장점을 존중하면서도 시장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하고 사기와 독점적 횡포, 근로자의 부당한 착취와 같은 불공정한 경제행위를 방지해야 한다. 또한 빈곤층과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고 지나친 소득 및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세와 소득재분배 정책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환경오염과 같은 부정적 외부효과를 줄이고 기업들이 자신들의 경제활동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지나친 시장개입이나 규제 역시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제한하고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정부는 시장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성경은 자본주의라는 현대의 경제체제를 직접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정직한 거래와 공정한 대가를 요구하며, 근면과 청지기적 책임을 강조하고, 가난한 사람과 이웃을 돌보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자본주의를 무조건 옹호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올바른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자유와 효율성은 정직, 공정, 절제, 책임 그리고 이웃 사랑이라는 성경적 경제윤리와 결합될 때 더욱 바람직한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다. 개인과 기업과 정부가 각자의 위치에서 이러한 책임을 다할 때, 경제는 단순히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수단을 넘어 사람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마치는 장

 

제 24장    실낙원(失樂園)의 회복  

경제학에서는 경제가 완전고용 수준에서 벗어나 있을 때, 일부 경제학자들, 곧 고전학파 경제학자들(classical economists)과 그 추종자들은 경제에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 자기조정 능력(self-correcting ability)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른 경제학자들, 곧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Keynesian economists)과 그 추종자들은 정부가 재정정책 및 통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경제가 완전고용 수준에 더욱 가까이 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덴동산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 없이 인간이나 정부의 힘만으로 실낙원(失樂園)을 회복할 수 있을까? 또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아모스 5장 24절의 말씀처럼 정의와 공의가 넘치는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낙원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을 거주하게 하시기 위하여 에덴동산을 세우셨다. 에덴동산은 왜 그렇게 중요했는가? 그것은 에덴동산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주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자원의 희소성(scarcity)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가나안 땅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선택하여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또 하나의 낙원을 세우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2:7; 13:15; 15:7, 18; 17:8; 24:7).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 3:8; 신 31:20).

그렇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낙원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낙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주권이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한다.

가나안 땅 자체가 본래부터 비옥한 땅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실 때 그 땅은 비옥하고 복된 땅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의 주민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거주하며 어울려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고 기드온, 사무엘, 다윗, 젊은 시절의 솔로몬, 그리고 솔로몬 이후 남유다의 일부 왕들과 계속 함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으며,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의 백성을 통하여 새 예루살렘을 세우고자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경험한 후에도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때가 이르면 또 다른 낙원의 표현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셨다(사 65:17–25). 하나님께서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5장 17–19절에서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장 13절에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말한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회복된 낙원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의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서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는 새 땅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두셨던 낙원, 곧 에덴동산의 모습과 유사하다.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동산 가운데 있었다(창 2:9). 창세기 2장 9절 하반절은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영원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막으셨다(창 3:22–24).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접근할 수 없게 되었던 생명나무가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나타난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는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흐르고, 그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끊임없이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는 인간이 잃어버린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생명나무가 다시 나타나는 새 예루살렘으로 나아간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인간이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낙원이 완전히 회복된 모습이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말한다. 생명수로 오라는 이 초청은 이사야 55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물로 초청하시는 말씀과 유사하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구약시대부터 시작된 생명수로의 하나님의 초청, 곧 사람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완성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온전히 다스리시며, 생명수를 값없이 베푸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부족함이나 죽음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경제도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이 땅에서의 낙원은 가능한가?

인간은 오랫동안 이 땅에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해 왔다. 경제성장을 통하여 빈곤을 줄이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며, 정부의 정책을 통하여 소득 불평등과 실업을 줄이고 사회복지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 땅에 완전한 낙원을 건설할 수 있을까?

경제학의 관점에서도 완전한 경제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권과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고 경쟁과 이윤 동기를 통하여 경제성장과 기술혁신을 촉진할 수 있지만, 지나친 탐욕, 소득과 부의 불평등, 근로자의 착취와 환경오염 등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반면에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소득을 재분배하고 경제적 평균을 추구하더라도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정부의 개입은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동기를 약화시키고 비효율성을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어떤 경제체제도 그 자체로 이 땅을 낙원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제도 자체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에게 있다. 인간에게 탐욕과 이기심, 질투와 불의가 존재하는 한 아무리 훌륭한 경제제도와 정부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정의와 공평을 이루기는 어렵다. 제도가 인간의 행동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개선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마음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이나 정부의 정책만으로 아모스가 말한 것처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는 완전한 사회를 이루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암 5:24).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억압받는 사람을 보호하며, 정직하고 공정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자신의 재산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며, 사회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한다. 정부 역시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면서 가난한 사람과 경제적 약자를 돌보고, 불공정한 경제행위를 방지하며, 사회의 정의와 공평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인간의 힘으로 완전한 낙원을 건설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서 낙원의 본질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는 장소에 있지 않다. 에덴동산이 낙원이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다스리셨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 역시 땅 자체가 낙원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다스리실 때 복된 땅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땅에서 낙원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며 다스리시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노력만으로 완전한 낙원을 회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나타낼 수 있다. 완전한 낙원의 회복은 인간의 경제제도나 정부의 정책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낙원을 소망하면서도 현재의 삶 속에서 정의와 공의, 사랑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날 실낙원의 회복

우리는 회복된 낙원을 보기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가? 잃어버린 낙원은 주의 날, 곧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완전하게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나라, 곧 낙원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NLT(New Living Translation)는 21절 하반절을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For the Kingdom of God is already among you)라고 번역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장차 실제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임하여 있다는 사실과 그 나라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눅 17:22).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그의 주권과 다스림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낙원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부분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낙원에 살고 있지는 않으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의 재림과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롬 8:18–25).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회복될 낙원의 모습을 현재의 삶 속에서 미리 경험하고 나타낼 수 있다.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피조물도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지만,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다(롬 8:19–21).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과 기도로 마무리한다. 요한계시록 22장 20–21절은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에르쿠 퀴리에 예수,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erchou kyrie Iēsou)라는 기도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아람어 기도인 “마라나 타”(מָרַנָא תָא, marana tha), 곧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간구와 같은 종말론적 소망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할 때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활동도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낙원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온전히 다스리실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단순히 더 나은 경제체제나 더 풍요로운 세상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데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실낙원의 회복은 단순히 인간이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났던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가계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통치와 축복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은 에덴동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도 잃어버렸다. 따라서 실낙원의 회복은 장소의 회복에 앞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가계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가계를 다시 세우고 확장해 오셨다. 에녹과 노아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한 민족에만 머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문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주셨으며, 복음 전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가계로 불러들이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 전도는 단순히 교회의 구성원을 증가시키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하나님의 경제의 중요한 과정이다.

하나님의 가계가 확장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가계의 구성원이 되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과 이익만을 삶의 최고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가 정직하고 공정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탐욕을 절제하며,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자신에게 위탁된 것을 이웃과 나누며,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가정과 교회뿐만 아니라 직장과 기업, 시장과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경제윤리가 더욱 넓게 실천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오늘날 이 땅에서 실낙원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가계가 확장되고 그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불의와 착취 대신 정의와 공의가, 속임수와 탐욕 대신 정직과 절제가, 이기적인 축적 대신 사랑과 나눔이 더 많이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완전한 낙원을 건설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 통치를 자신의 삶과 경제적 관계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이 땅에서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계가 이 세상에 아무리 넓게 확장된다 하더라도 인간의 노력만으로 실낙원을 완전하게 회복할 수는 없다. 죄와 죽음, 그리고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그 회복에 참여하지만, 그 회복을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의 현재적 확장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미래의 완성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일한 구원 계획 안에 있다.

마침내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가계는 그 완성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시며 온전히 다스리시고,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가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낙원은 완전하게 회복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그 목적에 도달하고,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께서 그의 가계를 다스리고 구원하며 확장해 오신 모든 활동도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분명하다. 복음을 전하여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가계로 초청하고,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며,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시장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경제윤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장차 완전히 회복될 낙원을 오늘의 세상 속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계가 온전히 완성되고 실낙원이 완전히 회복될 그날을 바라보며 요한과 함께 기도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책을 마감하면서 

이 책은 “성경에서 경제를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성경은 현대적인 의미의 경제학 교과서는 아니다. 수요와 공급의 모형이나 국민소득의 결정,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무엇을 선택하며, 다른 사람들과 어떠한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과 노동과 재능을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경제학이 인간과 경제주체들의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성경 역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의사결정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경제를 배울 수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성경적 경제 개념은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 oikonomia, economy)이다. 오이코노미아는 본래 가계 또는 집안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경제의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서 경제는 단순히 돈을 벌고 부를 축적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다스리시는 일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맡겨진 것을 올바르게 관리하는 청지기의 책임이다.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소유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가진 시간과 재능, 노동과 소득, 토지와 재산을 자신의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해야 한다.

제1부의 주제인 “하나님의 경제”는 이 책 전체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계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관리하시는 분이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오셨다. 하나님의 경제는 단순히 물질적인 자원을 관리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그들을 자신의 가계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통치 활동을 포함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제는 제2부에서 개인과 가정의 경제로 이어진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관리하는 관리자이자 청지기이다. 노동하고 소득을 얻으며, 소비하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나누는 모든 경제적 의사결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돈과 재산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수단이지만 그 자체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제3부의 “복음 전도의 경제”는 하나님의 경제가 그의 가계를 확장해 가는 과정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자신의 가계로 부르신다. 바울에게 복음 전도의 직분이 위탁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과 교회에도 복음을 전할 책임이 위탁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성장은 건물과 토지와 재정의 확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가계 안으로 들어오는 데 있다. 복음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 더욱 많아지는 것이 복음 전도의 경제가 지향하는 목적이다.

제4부의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는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이 실제 경제생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룬다. 그리스도인은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 판매자와 구매자, 고용주와 종업원, 그리고 국가와 국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정직과 공정, 겸손과 검소함, 탐욕의 절제, 근면과 신실함, 너그러움과 이웃 사랑은 단순한 개인적 덕목이 아니라 경제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할 성경적 원리이다. 이윤을 얻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이윤이 인간보다 중요해져서는 안 되며, 돈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성경적 경제윤리는 특정한 경제체제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권과 경제적 자유, 분권화된 의사결정과 시장의 기능을 통하여 경제성장과 창의성을 촉진할 수 있지만, 지나친 탐욕과 불평등, 착취와 환경문제를 가져올 수도 있다. 정부의 개입과 소득재분배 역시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고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지만, 지나칠 경우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동기를 약화시키고 비효율성을 가져올 수 있다. 결국 어떠한 경제체제도 인간의 죄와 탐욕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가치와 윤리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배우는 경제의 중심에는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돈과 재산을 하나님보다 앞세울 수 없으며, 이웃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착취할 수 없다. 내가 가진 것이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것임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나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할 수도 없다. 따라서 성경적 경제생활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시는가?”, “나의 경제적 의사결정이 이웃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이 결정이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에 합당한가?”라고 묻는 삶이다.

성경의 경제는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나아간다. 인간은 불순종으로 낙원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복음을 통하여 자신의 가계를 계속 확장해 오셨다. 하나님의 가계가 확장될수록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경제생활을 할 때 정의와 공의, 정직과 나눔, 사랑과 섬김이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완전한 낙원의 회복은 아니지만 장차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오늘의 삶 속에서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경제도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의 가계를 온전히 다스리시며,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타락으로 인한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것이다.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가 새 예루살렘에 다시 나타나고,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흐를 것이다.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그 목적에 도달하고 실낙원은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경제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서 현대 경제학의 개념들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의 궁극적인 주인이 누구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누구의 것이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일하고 소유하고 소비하고 나누어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 의사결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단순한 부의 극대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음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경제생활도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돈을 벌고, 사용하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나누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경제적 의사결정을 한다. 그 모든 결정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말씀을 따른다면 우리의 경제생활은 하나님의 경제에 참여하는 삶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배워야 할 경제이며, 이 책이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부록

 

하나님의 이름과 특성

여호와의 복합 명칭

여호와(Jehovah, יהוה = YHWH): 네 글자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이름(Tetragrammaton).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 곧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출 3:14; 6:2–4; 34:5–7; 시 102편).

여호와 보레(Jehovah-Bore): 창조주 여호와(The LORD Creator)(창 1:1; 욥 38:1–41; 39:1–30; 40:1; 시 33:6; 사 40:28–31).

여호와 엘로헤이켐(Jehovah-Eloheikhem): 너희 하나님 여호와(The LORD your God)(레 19:3–4).

여호와 그몰라(Jehovah-Gmolah): 보응하시는 여호와(The LORD of recompense)(렘 51:56).

여호와 이쉬 밀하마(Jehovah-Ish Milchamah): 용사이신 여호와(The LORD is a man of war)(출 15:3).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준비하시며 살피시는 여호와(The LORD who provides or sees)(창 22:14).

여호와 호케케누(Jehovah-Choqeqenu): 우리의 통치자이신 여호와(The LORD is our ruler)(사 33:22).

여호와 헤일리(Jehovah-Cheli): 나의 힘이신 여호와(The LORD is my strength)(출 15:2; 합 3:19).

여호와 마겐(Jehovah-Magen): 나의 방패이신 여호와(The LORD is my shield)(창 15:1; 시 91:4).

여호와 마흐세(Jehovah-Machseh): 나의 피난처와 소망이신 여호와(The LORD is my refuge and hope)(욥 11:18; 시 14:6; 39:7; 71:5; 91:2, 9; 121편; 욜 3:16).

여호와 멜렉(Jehovah-Melek): 우리의 왕이신 여호와(The LORD is our King)(삼상 12:12; 사 33:22).

여호와 메카데쉬, 여호와 메카디쉬켐(Jehovah-M’kaddesh, Jehovah-Mekoddishkem):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The LORD who sanctifies you)(출 31:12–13; 레 20:8; 21:8; 22:32; 겔 20:12).

여호와 나카(Jehovah-Nakah): 치시는 여호와(The LORD who smites)(겔 7:9).

여호와 닛시(Jehovah-Nissi): 나의 깃발이신 여호와(The LORD is my banner)(출 17:15; 신 20:3–4; 사 11:10–12).

여호와 오세누(Jehovah-Osenu):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The LORD our Maker)(시 95:6).

여호와 라파, 여호와 로페카(Jehovah-Rapha, Jehovah-Rophekha): 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The LORD who heals you)(출 15:25–27; 시 103:3; 147:3).

여호와 로이, 여호와 라아(Jehovah-Roi, Jehovah-Raah): 나의 목자이신 여호와(The LORD is my shepherd)(시 23:1; 사 53:6; 겔 34:2).

여호와 살리, 여호와 셀라(Jehovah-Sali, Jehovah-Selah):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The LORD is my rock)(시 18:2).

여호와 샬롬(Jehovah-Shalom): 평강이신 여호와(The LORD is peace)(민 6:26; 삿 6:24; 사 9:6).

여호와 삼마(Jehovah-Shammah): 거기에 계시는 여호와(The LORD is there)(겔 48:35; 시 46편).

여호와 쇼페테누(Jehovah-Shofetenu): 우리의 재판장이신 여호와(The LORD is our Judge)(사 33:22).

여호와 체바오트, 여호와 사바오트(Jehovah-Tsevaot, Jehovah-Sabaoth): 만군의 여호와(The LORD of hosts)(삼상 1:3; 17:45; 시 46:7; 말 1:10–14).

여호와 치드케누(Jehovah-Tsidkenu): 우리의 의이신 여호와(The LORD is our righteousness)(렘 23:6; 33:16).

여호와 추리 베고알리(Jehovah-Tsuri ve-Goali):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The LORD is my Rock and my Redeemer)(시 19:14).

 

엘의 복합 명칭

엘로힘(Elohim): 전능하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The Almighty God, the Triune God)(창 1:1–3; 신 10:17; 시 68편).

엘로힘 하임(Elohim-Chaiyim): 살아 계시는 하나님(The Living God)(렘 10:10).

엘로힘 케도심(Elohim-Kedoshim):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Our Holy God)(레 19:2; 수 24:19).

엘 하야이(El-Chaiyai): 나의 생명이신 하나님(The God of my life)(시 42:8).

엘 하눈(El-Channum): 은혜로우신 하나님(The Gracious God)(욘 4:2).

엘 훌(El-Chuwl): 생명을 주신 하나님(The God who gave you life)(사 43:1–3; 시 139:13–18).

엘 데오트, 엘 데아(El-De’ot, El-Deah): 지식의 하나님(The God of knowledge)(삼상 2:3).

엘 에하드(El-Echad): 한 분이신 하나님(The One God)(말 2:10).

엘 엘로헤 이스라엘(El-Elohe Israel):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God of Israel)(창 33:20; 출 5:1; 시 68:8; 106:48).

엘 엘리온(El-El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The Most High God)(창 14:20, 22; 민 24:16; 시 7:17; 9:2; 47:2; 단 4:34).

엘 에메트(El-Emeth):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ruth)(시 31:5).

엘 에무나(El-Emunah): 신실하신 하나님(The Faithful God)(신 32:4).

엘 깁보르(El-Gibbor):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God)(사 9:6).

엘 하가돌(El-Hagadol): 위대하신 하나님(The Great God)(신 10:17).

엘 하카보드(El-Hakavod): 영광의 하나님(The God of glory)(시 29:3).

엘 하카도쉬(El-Hakkadosh):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이(The Holy God, the Holy One)(사 5:16).

엘 하네에만(El-Hanne’eman): 신실하신 하나님(The Faithful God)(신 7:9).

엘 하노라(El-Hannora): 경외할 하나님(The Awesome God)(느 9:32).

엘 하샤마임(El-Hashamyim): 하늘의 하나님(The God of the heavens)(시 136:26).

엘 이스라엘(El-Israel): 이스라엘의 하나님(The God of Israel)(시 68:36).

엘 올람(El-Olam): 영원하신 하나님(The Everlasting God)(창 21:33; 시 90:1–2; 93:2; 사 26:4; 40:28).

엘 칸나, 엘 칸노(El-Kanna, El-Kanno): 질투하시는 하나님(The Jealous God)(출 20:5; 34:14; 민 5:14, 30; 신 4:24; 5:9; 6:15; 수 24:19).

엘 라훔(El-Rachum):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The God of mercy or compassion)(신 4:31).

엘 로이(El-Roi): 감찰하시는 하나님(The God who sees)(창 16:13; 시 139:7–12).

엘 살리(El-Sali): 나의 힘이시며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The God of my strength or my rock)(시 42:9).

엘 샤다이(El-Shaddai):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The Almighty or All-Sufficient God)(창 17:1; 28:3; 35:11; 43:14; 48:3; 49:25; 출 6:3; 민 24:6; 룻 1:20; 시 22:10; 68:15; 91:1; 겔 1:24; 10:25; 23:21).

엘 심하트 길리(El-Simchat Gili): 나의 큰 기쁨이신 하나님(The God of the joy of my exaltation)(시 43:4).

엘 차디크(El-Tzadik): 의로우신 하나님(The Righteous God)(사 45:21).

엘 예슈아티(El-Yeshuati):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The God of my salvation)(사 12:2).

엘 예슈아테누(El-Yeshuatenu):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The God of our salvation)(시 68:19).

엘 예슈룬(El-Yeshurun): 여수룬의 하나님, 곧 “의로운 백성”의 하나님(The God of Jeshurun)(신 32:15; 33:5).

임마누엘(Immanuel):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God is with us)(사 7:14).

엘로하이 하스디(Elohay Chasdi): 나의 인자의 하나님(God of my kindness)(시 59:11–18).

엘로하이 엘로힘(Elohay Elohim): 모든 신들 위의 하나님(God of gods)(신 10:17).

엘로하이 케뎀(Elohay Kedem):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God of the beginning)(신 33:27).

엘로하이 마롬(Elohay Marom): 높은 곳의 하나님(God of heights)(미 6:6).

엘로하이 마우지(Elohay Mauzi): 나의 힘이신 하나님(God of my strength)(시 43:2).

엘로하이 미카로브(Elohay Mikarov):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God who is near)(렘 23:23).

엘로하이 셀리호트(Elohay Selichot): 용서하시는 하나님(God of forgiveness)(느 9:17).

엘로하이 테힐라티(Elohay Tehilati): 나의 찬송이신 하나님(God of my praise)(시 109:1).

엘로하이 이쉬이(Elohay Yishi):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God of my salvation)(시 18:47; 25:5).

 

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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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trong’s Hebrew Concordance』, “4043. magen 또는 meginnah,” 『BibleHub』.

[2] 같은 자료, “4268. machaseh 또는 machseh,” 『BibleHub』.

[3] 같은 자료, “4686. matsuwd,” 『BibleHub』.

[4] 같은 자료, “4869. misgab,” 『BibleHub』.

[5] 같은 자료, “3384. yarah 또는 yara,” 『BibleHub』.

[7] 『Strong’s Hebrew Concordance』, “4399. melakah,” 『BibleHub』.

[8] 같은 자료, “5647. abad,” 『BibleHub』.

[9] M. D. Meeks, God The Economist. Fortress Press, 1989, 128-130.

[10] Strong’s Hebrew Concordance, “6093. itstsabon,” 『BibleHub』.

[11] 최건수,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서울: 쿰란출판사, 2013), 21-23쪽.

 

[12] M. Douglas Meeks, God the Economist (Fortress Press, 1989), 85–86.

[13] Strong’s Hebrew Concordance, “6509. parah,” 『BibleHub』.

[14] 같은 자료, “7235. rabah,” 『BibleHub』.

[15] 같은 자료, “1431. gadal,” 『BibleHub』.

[16] 같은 자료, “2428. chayil,” 『BibleHub』.

[17] Howard Dayton, Your Money Counts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1996), 4–5.

[19] 최건수,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서울: 쿰란출판사, 2013), 249–251, 255–257쪽.

 

[20] Irvin B. Tucker, Economics for Today, 10th ed. (Cengage Learning, 2019), 794–795.

[21] 같은 자료, 795–796쪽.

[22] 같은 자료, 796–797쪽.

[23] “Communism vs. Socialism,” 『Diffen』.

[24] 같은 자료.

[25] 최건수,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서울: 쿰란출판사, 2013), 258–259쪽.

 

[26] S. Elwart, “Biblical Principles of Economics,” Koinonia House (October 1, 2011).

[27] K. F. Nickle, The Collection: A Study in Paul’s Strategy (Alec R. Allenson Inc., 1966), 93–94.

[28] 최건수, 『약할 때 곧 강함이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5 — 고린도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1), 221–223쪽.

[29]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Harper & Row, 1973), 218.

[30] Foerster, TDNT, vol. 9 (1974), 393.

[31] 최건수, 『약할 때 곧 강함이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5 — 고린도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1), 234쪽.

[32] 같은 자료, 235.

[33]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Harper & Row, 1973), 226.

[34] 최건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시리즈 4 ― 고린도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0), 238쪽.

[35] 최건수,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시리즈 1 ― 로마서』 (서울: 쿰란출판사, 1999), 318–322쪽.

[36] Hugh Whelchel, “Four Principles of Biblical Stewardship,” Institute for Faith, Work & Economics (November 26, 2012).

[37] Hugh Whelchel, “Three Key Passages Concerning Stewardship in the Bible,” Institute for Faith, Work & Economics (October 19, 2016).

[38] Strong’s Hebrew Concordance, “4943. mesheq,” 『BibleHub』.

[39] Irvin B. Tucker, 『Economics for Today』, 10th ed. (Cengage Learning, 2019), 4쪽.

[40] B. R. Barringer and R. D. Ireland, 『Entrepreneurship』, 3rd ed. (Pearson, 2010), 6쪽.

[41] 같은 자료, 9-13쪽.

[42] Jeff Rose, “10 Bible Verses Every Entrepreneur Needs to Read,” 『Good Financial Cents』 (August 12, 2013).

[43] Shane Hall, “Economics: Equity vs. Efficiency,” 『Bizfluent』 (September 26, 2017).

[44] Torben M. Andersen and Jonas Maibom, “The Trade-Off between Efficiency and Equity,” 『VOX』 (May 29, 2016).

[45] John Buck, “Economic Efficiency and Equity,” 『Economic Perspectives』. (February 10, 2008).

[46] Strong’s Hebrew Concordance, “6666. tsedaqah,” 『BibleHub』.

[47] 같은 자료, “4339. meshar,” 『BibleHub』.

[48] Strong’s Hebrew Concordance, “4627. maʿarav,” 『BibleHub』.

[49] 같은 자료, “5503. sachar,” 『BibleHub』.

[50] 같은 자료, “5504와 5505. sachar,” 『BibleHub』.

[51] ATS Bible Dictionary, “Market,” 『BibleHub』.

[52] 같은 자료.

[53] Bob Becking, “Biblical Games: Game Theory and the Hebrew Bible,” 『Ars Disputandi』, Vol. 3 (2003), 91–93. Becking은 이 논문에서 Steven J. Brams의 『Biblical Games: Game Theory and the Hebrew Bible』 (Cambridge, MA, 1982)을 논의한다.

[54] Strong’s Hebrew Concordance, “8104. shamar,” 『BibleHub』.

[55] 같은 자료, “2610. chaneph,” 『BibleHub』.

[56] Thayer’s Greek Lexicon, “1577. ekklēsia,” 『BibleHub』.

[57] Eusebius, 『The Ecclesiastical History』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3).

[58] Shusaku Endo, 『Silence』 (Picador Modern Classics, 2016).

[59] O. C. Ferrell, J. Fraedrich, L. Ferrell, 『Business Ethics: Ethical Decision Making and Cases』, 12th ed. (Cengage Learning, 2019), 58–60쪽.

[61] Michael Knopf, “A Biblical Case for Raising the Minimum Wage,” 『Huffington Post』 (February 18, 2014).

[62] 최건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시리즈 2 — 에베소서·빌립보서』 (서울: 쿰란출판사, 1999), 178–181쪽.

[63] 최건수, 『다른 복음은 없나니: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시리즈 6 — 갈라디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5), 196쪽.

[64] 최건수,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시리즈 1 — 로마서』 (서울: 쿰란출판사, 1999), 254–257쪽.

[65] Edd Noell, “Capitalism and Christian Ethics,” 『Free Market Forum』, Hillsdale Colleg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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