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21, 2026

자본주의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자본주의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사유재산권

사유재산권은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사회주의의 정부 소유 및 공산주의의 공동 소유와 구별된다. 사회주의에서는 주요 생산수단을 정부 또는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반면, 공산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 구성원 전체의 공동 소유를 지향한다.

구약성경에서도 사유재산권은 인정되었다. 물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소유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소유권이며, 궁극적인 소유권은 하나님께 속한다. 이러한 사유재산권은 신약성경에서도 계속 인정되었다.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생활하였으며, 사도행전 2 4347절과 4 3235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의 소유를 공동체에 내놓아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

이러한 공생주의(Commonism) 아래에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사유재산권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유재산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신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그것을 공동체의 필요를 위하여 사용하고 서로 나누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의 경제체제인 공생주의는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체제가 아니라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면서 자발적인 나눔을 실천한 것으로서, 사유재산권을 기본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의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장에서의 분권화된 의사결정

자본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시장에서의 분권화된 의사결정이다.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과 거래량을 결정하는 것은 중앙 권력이 아니라 시장이다. 성경은 시장과 시장의 기능을 부정하지 않는다. 판매자들은 시장에서 자신들의 상품을 판매하고, 구매자들은 시장에서 필요한 상품을 구매한다.

분권화된 의사결정이란 정부나 중앙기관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누구에게 얼마의 가격으로 판매할 것인지를 일일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과 기업이 각자의 상황과 판단에 따라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자는 자신의 소득과 필요, 선호를 고려하여 무엇을 얼마나 구매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생산자는 생산비용과 예상되는 이익, 소비자의 수요 등을 고려하여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판매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노동자도 자신의 노동을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제공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기업은 필요한 노동과 자본을 얼마나 고용하고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수많은 경제주체들이 각자 의사결정을 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의사결정은 시장의 가격을 통하여 서로 연결된다. 어떤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다른 조건이 같을 경우 가격이 상승하고, 이는 생산자에게 생산을 늘리라는 신호가 된다. 반대로 수요가 감소하면 가격이 하락하여 생산을 줄이도록 하는 신호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시장가격은 단순히 상품의 값을 나타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비자의 필요와 선호, 상품의 희소성, 그리고 생산비용 등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가격기구(price mechanism)를 통하여 제한된 자원이 다양한 용도 사이에 배분된다.

그러므로 시장에서의 분권화된 의사결정은 경제적 자유와 함께 책임을 수반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판매자와 구매자, 고용주와 종업원 등 각 경제주체는 자신의 의사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성경적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의사결정도 정직과 공정, 이웃 사랑과 청지기적 책임이라는 하나님의 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본주의에서의 기업의 동기

생산자나 판매자는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반면, 구매자는 자신의 효용(utility), 곧 만족이나 행복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판매자가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거짓말, 속임수, 사기 등 비윤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불법적인 행위에까지 이를 수 있다.

최근 기업들은 환경 문제, 곧 지구온난화, 오염 감소, 친환경 에너지 등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기업이 이윤(profit)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people)과 지구환경(planet)도 함께 고려하는 트리플 바텀라인(Triple Bottom Line)을 추구하는 것은 기업 자신과 종업원들에게뿐만 아니라 사회와 그 구성원들, 그리고 환경에도 유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바람직한 경영방식이 될 수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기업은 이윤의 극대화만을 목표로 삼기보다 오염물질과 온실가스 배출 등 부정적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ies)를 줄여 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기업의 목표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업의 경영방식은 기업의 경제적 성과와 함께 사람과 환경에 대한 책임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자본주의의 윤리적 문제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불평등이다. 부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으며 소득에도 차이가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을 장려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으며, 그 결과 소득 불평등 또는 부의 불평등이 발생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거나 그 밖의 불법적인 행위를 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기술이나 재능이 부족하거나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기술과 재능이 뛰어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자신이 축적한 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훨씬 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탐욕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탐욕을 자극할 수 있다. 적절한 수준의 이익 추구와 경제적 욕구는 경제성장의 동기가 될 수 있지만, 지나친 탐욕은 기업과 기업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지나친 탐욕은 사람들을 부정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이용하도록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는 또한 기업들이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재화와 서비스를 과도하게 생산할 경우 환경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오늘날 사회는 온실가스와 각종 오염물질의 배출 등으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이 이윤만을 추구하면서 생산활동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무시한다면, 그 경제활동은 사회 전체에 상당한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도 가운데 하나가 십일조이다. 십일조는 기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가난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돕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원리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풍요를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어야 함을 보여 준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정부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재분배함으로써 이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정부는 조세와 소득재분배 정책을 통하여 지나친 소득 불평등이나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책은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 원리에만 의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어느 정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과 생산량이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결정되는 시장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상인이나 판매자가 저울이나 상품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고 공정하게 거래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고용주는 종업원들의 필요와 어려운 형편을 알고 그들의 처지를 이용하여 부당하게 착취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나 부가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 결과 돈과 부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우리에게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6:24). 또한 바울은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말한다(딤전 6:10).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사랑하거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이다. 돈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돈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여러 가지 문제에 빠질 수 있다. 돈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얻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부정직하거나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거나 심지어 불법적인 일에까지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 노엘(Edd Noell)이 지적하듯이, 자본주의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와 양립할 수 있다.[1]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가 올바르게 실천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우선순위를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정직하고 근면하며 지나치게 탐욕스럽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그들을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사유재산권과 시장에서의 분권화된 의사결정,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이윤 추구를 기본적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제도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촉진하고 경제성장의 동기를 제공할 수 있지만, 동시에 지나친 탐욕과 소득 및 부의 불평등, 근로자의 착취, 불공정한 거래, 환경오염과 같은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 자체가 이러한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가치와 윤리적 원칙에 따라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 자유를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유재산권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주어진 소유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과 소득, 재능과 노동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아야 한다. 돈과 부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며, 정직하고 근면하며 지나친 탐욕을 절제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판매자는 구매자를 속이지 말아야 하고, 구매자도 판매자를 정직하게 대해야 하며, 고용주는 종업원을 착취하지 말고 그들의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기업 역시 이윤만을 추구하기보다 사람과 환경에 대한 책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더 큰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성경은 부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지만,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면서 자신의 부만을 축적하는 삶을 경계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셨다면 그것을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 어려운 이웃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경제적 성공의 기준은 단순히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가 아니라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신실하게 관리하고 사용했는가?”가 되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시장경제의 장점을 존중하면서도 시장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하고 사기와 독점적 횡포, 근로자의 부당한 착취와 같은 불공정한 경제행위를 방지해야 한다. 또한 빈곤층과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고 지나친 소득 및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세와 소득재분배 정책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환경오염과 같은 부정적 외부효과를 줄이고 기업들이 자신들의 경제활동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지나친 시장개입이나 규제 역시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제한하고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정부는 시장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성경은 자본주의라는 현대의 경제체제를 직접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정직한 거래와 공정한 대가를 요구하며, 근면과 청지기적 책임을 강조하고, 가난한 사람과 이웃을 돌보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자본주의를 무조건 옹호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올바른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자유와 효율성은 정직, 공정, 절제, 책임 그리고 이웃 사랑이라는 성경적 경제윤리와 결합될 때 더욱 바람직한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다. 개인과 기업과 정부가 각자의 위치에서 이러한 책임을 다할 때, 경제는 단순히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수단을 넘어 사람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도구가 될 수 있다.



[1] Edd Noell, “Capitalism and Christian Ethics,” Free Market Forum, Hillsdale College (2016).

Sunday, September 20, 2026

실낙원(失樂園)의 회복

실낙원(失樂園)의 회복  

 

경제학에서는 경제가 완전고용 수준에서 벗어나 있을 때, 일부 경제학자들, 곧 고전학파 경제학자들(classical economists)과 그 추종자들은 경제에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 자기조정 능력(self-correcting ability)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른 경제학자들, 곧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Keynesian economists)과 그 추종자들은 정부가 재정정책 및 통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경제가 완전고용 수준에 더욱 가까이 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덴동산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 없이 인간이나 정부의 힘만으로 실낙원(失樂園)을 회복할 수 있을까? 또는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아모스 5 24절의 말씀처럼 정의와 공의가 넘치는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낙원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을 거주하게 하시기 위하여 에덴동산을 세우셨다. 에덴동산은 왜 그렇게 중요했는가? 그것은 에덴동산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주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자원의 희소성(scarcity)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가나안 땅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선택하여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또 하나의 낙원을 세우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12:7; 13:15; 15:7, 18; 17:8; 24:7).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3:8; 31:20).

그렇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낙원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낙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주권이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한다.

가나안 땅 자체가 본래부터 비옥한 땅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실 때 그 땅은 비옥하고 복된 땅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의 주민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거주하며 어울려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고 기드온, 사무엘, 다윗, 젊은 시절의 솔로몬, 그리고 솔로몬 이후 남유다의 일부 왕들과 계속 함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으며,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의 백성을 통하여 새 예루살렘을 세우고자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경험한 후에도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때가 이르면 또 다른 낙원의 표현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셨다( 65:17–25). 하나님께서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5 17–19절에서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 13절에서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말한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회복된 낙원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의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1 1–2절에서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2 1–2절에서는 새 땅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두셨던 낙원, 곧 에덴동산의 모습과 유사하다.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동산 가운데 있었다( 2:9). 창세기 2 9절 하반절은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영원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막으셨다( 3:22–24).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접근할 수 없게 되었던 생명나무가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나타난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는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흐르고, 그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끊임없이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는 인간이 잃어버린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생명나무가 다시 나타나는 새 예루살렘으로 나아간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인간이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낙원이 완전히 회복된 모습이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22 17절에서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말한다. 생명수로 오라는 이 초청은 이사야 55 1절에서 하나님께서 물로 초청하시는 말씀과 유사하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구약시대부터 시작된 생명수로의 하나님의 초청, 곧 사람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완성될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온전히 다스리시며, 생명수를 값없이 베푸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부족함이나 죽음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경제도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이 땅에서의 낙원은 가능한가?

인간은 오랫동안 이 땅에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해 왔다. 경제성장을 통하여 빈곤을 줄이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며, 정부의 정책을 통하여 소득 불평등과 실업을 줄이고 사회복지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 땅에 완전한 낙원을 건설할 수 있을까?

경제학의 관점에서도 완전한 경제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권과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고 경쟁과 이윤 동기를 통하여 경제성장과 기술혁신을 촉진할 수 있지만, 지나친 탐욕, 소득과 부의 불평등, 근로자의 착취와 환경오염 등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반면에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소득을 재분배하고 경제적 평균을 추구하더라도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정부의 개입은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동기를 약화시키고 비효율성을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어떤 경제체제도 그 자체로 이 땅을 낙원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제도 자체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에게 있다. 인간에게 탐욕과 이기심, 질투와 불의가 존재하는 한 아무리 훌륭한 경제제도와 정부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정의와 공평을 이루기는 어렵다. 제도가 인간의 행동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개선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마음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이나 정부의 정책만으로 아모스가 말한 것처럼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하는 완전한 사회를 이루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5:24).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억압받는 사람을 보호하며, 정직하고 공정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자신의 재산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며, 사회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한다. 정부 역시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면서 가난한 사람과 경제적 약자를 돌보고, 불공정한 경제행위를 방지하며, 사회의 정의와 공평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인간의 힘으로 완전한 낙원을 건설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서 낙원의 본질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는 장소에 있지 않다. 에덴동산이 낙원이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다스리셨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 역시 땅 자체가 낙원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다스리실 때 복된 땅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땅에서 낙원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결국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며 다스리시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노력만으로 완전한 낙원을 회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나타낼 수 있다. 완전한 낙원의 회복은 인간의 경제제도나 정부의 정책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낙원을 소망하면서도 현재의 삶 속에서 정의와 공의, 사랑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날 실낙원의 회복

우리는 회복된 낙원을 보기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가? 잃어버린 낙원은 주의 날, 곧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완전하게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나라, 곧 낙원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 20–21절에서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NLT(New Living Translation) 21절 하반절을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For the Kingdom of God is already among you)라고 번역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장차 실제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임하여 있다는 사실과 그 나라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17:22).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그의 주권과 다스림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낙원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부분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낙원에 살고 있지는 않으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의 재림과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8:18–25).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회복될 낙원의 모습을 현재의 삶 속에서 미리 경험하고 나타낼 수 있다.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피조물도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지만,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다( 8:19–21).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과 기도로 마무리한다. 요한계시록 22 20–21절은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에르쿠 퀴리에 예수, ρχου κύριε ησο, erchou kyrie Iēsou)라는 기도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아람어 기도인 마라나 타”(מָרַנָא תָא, marana tha),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간구와 같은 종말론적 소망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할 때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활동도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낙원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온전히 다스리실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단순히 더 나은 경제체제나 더 풍요로운 세상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데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실낙원의 회복은 단순히 인간이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났던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가계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통치와 축복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은 에덴동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도 잃어버렸다. 따라서 실낙원의 회복은 장소의 회복에 앞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가계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가계를 다시 세우고 확장해 오셨다. 에녹과 노아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한 민족에만 머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문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주셨으며, 복음 전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가계로 불러들이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 전도는 단순히 교회의 구성원을 증가시키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하나님의 경제의 중요한 과정이다.

하나님의 가계가 확장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가계의 구성원이 되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과 이익만을 삶의 최고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가 정직하고 공정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탐욕을 절제하며,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자신에게 위탁된 것을 이웃과 나누며,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가정과 교회뿐만 아니라 직장과 기업, 시장과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경제윤리가 더욱 넓게 실천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오늘날 이 땅에서 실낙원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가계가 확장되고 그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불의와 착취 대신 정의와 공의가, 속임수와 탐욕 대신 정직과 절제가, 이기적인 축적 대신 사랑과 나눔이 더 많이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완전한 낙원을 건설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 통치를 자신의 삶과 경제적 관계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이 땅에서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계가 이 세상에 아무리 넓게 확장된다 하더라도 인간의 노력만으로 실낙원을 완전하게 회복할 수는 없다. 죄와 죽음, 그리고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그 회복에 참여하지만, 그 회복을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의 현재적 확장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미래의 완성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일한 구원 계획 안에 있다.

마침내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가계는 그 완성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시며 온전히 다스리시고,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가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낙원은 완전하게 회복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그 목적에 도달하고,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께서 그의 가계를 다스리고 구원하며 확장해 오신 모든 활동도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분명하다. 복음을 전하여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가계로 초청하고,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며,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시장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경제윤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장차 완전히 회복될 낙원을 오늘의 세상 속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계가 온전히 완성되고 실낙원이 완전히 회복될 그날을 바라보며 요한과 함께 기도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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