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4, 2026

공산주의와 공생주의

공산주의와 공생주의

 

경제체제(經濟體制)

경제체제에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과 수량이 결정되는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한다. 반면 사회주의는 중앙정부 또는 중앙계획기관이 가격과 수량을 결정하는 계획경제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순수한 시장경제보다는 혼합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혼합경제에서는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과 수량이 결정되지만, 필요한 경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가격이나 수량을 규제하기도 한다.

자본주의(資本主義)

자본주의는 자원과 시장의 사적 소유(private ownership)를 특징으로 하는 경제체제로서, 자유기업체제(free enterprise system)라고도 한다.[1] 자본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시장을 통한 분권화된 의사결정이다. 오늘날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러한 자본주의의 두 가지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미국은 비교적 이에 가까운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과 이윤동기가 기업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낮은 비용으로 생산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장점은 경제적 자유이다. 경제적 권력이 여러 경제주체들에게 널리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에는 몇 가지 단점도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소득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 민간시장은 공공재를 적절한 수준으로 공급하지 못할 수 있다. 셋째,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거시경제적 불안정이 발생하여 심각한 경기침체나 심지어 경제공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넷째, 시장에만 맡길 경우 환경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할 수 있다.

사회주의(社會主義)

사회주의는 자원의 정부 소유와 중앙집권적인 의사결정을 특징으로 하는 경제체제이다.[2] 따라서 사회주의의 주요 특징은 자원에 대한 공공 또는 정부 소유와 경제적 의사결정의 중앙집권화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명령경제체제(command system)를 통하여 철강, 전력, 농업과 같은 주요 산업을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가 소유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농업, 소매업 및 일부 서비스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시장이 존재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발생하는 시장실패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할 경우, 한 국가는 생산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시장의 결과를 반드시 개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부의 개입으로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가 좋지 않은 경제적 결과를 가져오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부 정부 관리들이 부패하거나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갖추지 못하거나 특수이익집단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장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자본과 그 밖의 자원을 정부가 소유함으로써 소수의 개인이나 집단이 국가 전체의 부 가운데 지나치게 많은 몫을 차지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공평한 소득분배를 이룰 수 있다. 둘째, 중앙계획기관이 소비재 생산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을 배분하고 자본재 생산에는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할 수 있기 때문에 빠른 경제성장을 추진할 수 있다. 셋째, 정부가 고용을 계획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체제에서는 실업을 줄이거나 완전고용을 추구할 수 있다.

반면 사회주의에는 몇 가지 단점도 있다. 첫째, 한두 명의 근로자만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에 정부가 지나치게 많은 근로자를 고용하는 경우 경제적 비효율성이 발생할 수 있다. 둘째, 이윤동기의 부재는 기업가정신과 혁신을 약화시킬 수 있으며, 그 결과 경제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 셋째, 중앙계획 과정에서 잘못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것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넷째, 정부 관리들에게 주어지는 각종 특혜(perks), 연고주의(nepotism), 그리고 불법적인 시장거래 등으로 인하여 소득 격차가 발생할 수 있다.

공산주의(共産主義)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주의를 거부하였으며, 기업의 소유자들, 곧 자본가들이 얻는 이윤을 정당하지 않은 소득으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의 끊임없는 이윤 추구가 지나치게 되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낮은 임금을 지급하게 될 것이며, 결국 시장경제체제는 스스로 붕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르크스(Marx)는 사적 소유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인하여 소수의 “가진 자들(haves)”과 다수의 “가지지 못한 자들(have-nots)” 사이에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사회가 형성될 것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Marx)는 공산주의를 이상적인 경제체제로 생각하였다.

공산주의는 국가와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경제체제로서, 모든 생산요소를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며 사유재산은 존재하지 않고, 생산된 재화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진다.[3] 이상적인 공산주의에서는 각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 또한 기술의 발전으로 재화가 매우 풍부하게 생산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비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본다.[4] 마르크스의 견해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이며 혁명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경제체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마르크스가 설명한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한 국가는 없으며, 자본주의 역시 그가 예측했던 것처럼 스스로 붕괴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비교

많은 나라에 사회주의 정당이나 사회주의적 경제체제가 존재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나라들이 사회주의 원리의 일부를 받아들인 정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흔히 서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두 경제체제 또는 이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5] 사회주의에서는 재산이나 주요 생산수단을 중앙정부 또는 국가가 소유하는 반면, 이상적인 공산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모든 노동자가 공동으로 소유한다. 또한 사회주의에서는 중앙정부 또는 국가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경제활동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반면, 이상적인 공산주의에서는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실에서 공산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의 경제체제와 마르크스가 이상적으로 제시한 공산주의 사회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구소련(소비에트 연방), 중국, 북한 등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또는 표방하는 국가들에서는 오히려 국가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생산과 분배를 통제해 왔지만, 마르크스가 생각한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궁극적으로 계급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도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한 국가들의 실제 경제체제는 마르크스가 말한 최종적인 공산주의 사회라기보다 국가가 강력하게 경제를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적 단계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공생주의(共生主義)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 사도행전 2장 44–45절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라고 말한다. 또한 사도행전 4장 32절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생활을 “공생주의(Commonism)”라고 부른다. 공생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물건을 사용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받았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공산주의의 삶과 매우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서는 사적 소유가 인정되지 않고 공동 소유를 원칙으로 하는 반면, 공생주의에서는 사적 소유가 인정된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다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유를 자발적으로 교회 공동체에 내놓은 후에는 그것을 더 이상 자신의 개인적인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고 공동체의 필요를 위하여 함께 나누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보편적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에 속한 지체들로서 서로를 위하여 살아갔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공생주의(Commonism), 곧 공동체적 삶은 나눔과 평등이라는 경제적 원리에 기초한 삶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주의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돈을 벌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것을 사용한다. 자본주의의 주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소득 불평등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질 수 있다. 이러한 소득 격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으며, 소득 불평등의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경제적·사회적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공산주의에서는 개인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일하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 공산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노동자들 또는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소유한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이상적인 경제체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공동 소유는 열심히 일하여 더 많은 성과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근로의욕이나 동기(incentive)를 약화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노력에 따른 결과를 자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구(欲求)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제 전체의 생산성이 낮아질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의 빈곤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공생주의(Commonism)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생주의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한다. 다시 말하면, 공생주의에서 개인은 자본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능력에 따라 돈을 벌고 자신의 재산과 부를 소유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보다 가난한 이웃들을 같은 몸에 속한 지체들로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한 것의 일부 또는 전부를 공동체나 교회에 내놓아 그들과 기꺼이 나눈다. 이러한 나눔은 정부나 중앙기관에 의하여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진다.[6]

공생주의의 기원

이러한 공생주의의 정신은 나눔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4장 13–21절에서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막 6:30–44; 눅 9:10–17; 요 6:1–14). 만일 예수님께서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셨다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굶주렸을 것이고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아이의 한 끼 식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것을 받아 떼어 나누어 주셨을 때, 제자들과 무리는 모두 배불리 먹는 기적을 경험하였으며 남은 조각도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시면서(마 14:16), 그들도 이 놀라운 나눔의 기적에 참여하게 하셨다. 마태복음 14장 19절은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 기적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서 모든 민족에 대한 심판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자기 영광으로 오실 때,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서로 구분하시고,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25:34–36).

예수님께서 무리를 먹이신 사건(마 14:13–21; 16:5–12)과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심판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마 25:31–46)은 공생주의, 곧 나눔의 경제적 원리를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9장 16–22절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근심하며 떠나갔다(마 19:21–22). 이러한 예수님의 나눔에 관한 가르침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삶은 바울에게로 이어져 그의 나눔의 경제에 나타났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공생주의는 오늘날의 교회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정부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첫째, 공생주의는 모든 사람의 재산을 강제로 공동 소유로 만드는 제도가 아니다. 초대교회의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를 인정하면서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나누었다. 그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준 것은(행 2:44–45; 4:32–35) 사유재산을 제도적으로 폐지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발적인 나눔을 통하여 공동체의 필요를 채운 것이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공생주의는 공산주의의 강제적인 공동 소유와 구별된다.

둘째,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가 보여 준 이러한 나눔의 정신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성장과 성공을 건물의 크기나 재산, 예산의 규모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초대교회는 공동체 안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을 때 그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교회도 교회의 재산과 헌금을 교회 자체의 유지와 확장만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 어려움에 처한 믿음의 사람들과 이웃을 돕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하나님의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의 필요를 돌보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공생주의의 중요한 모습이다.

셋째, 공생주의는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자신의 소유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개인의 소유와 경제적 성취는 인정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을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재물과 능력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사용할 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자발적으로 돕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공생주의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가진 것을 통하여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며 함께 살아가는 데 있다.

넷째, 이러한 원리는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부를 가진 사람을 단순히 부자라는 이유로 비난해서도 안 되며, 가난한 사람을 그의 가난 때문에 무시해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이다. 많이 가진 사람은 어려운 사람과 나눌 수 있어야 하며, 도움을 받는 사람도 가능한 범위에서 자신의 능력과 노동을 통하여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의 공생주의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에 의존하는 관계보다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다섯째, 성경의 공생주의는 정부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정부의 역할은 모든 사람의 재산을 소유하거나 모든 사람의 소득을 똑같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시장에서 이루어진 경제적 결과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만으로 정부의 책임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정부는 국민이 납부한 세금과 공공의 자원을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며 다시 자립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제도와 기회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경제적 약자가 부당하게 착취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섯째, 정부의 지원 역시 단순히 재화를 나누어 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교육과 직업훈련, 일자리와 경제활동의 기회를 통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친 정부 의존이 개인의 책임과 노동의 동기를 약화시키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면서 질병이나 장애, 실업, 재난 또는 경제적 환경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도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결국 성경에 나타난 공생주의는 공산주의처럼 사유재산을 폐지하여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자는 경제체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만을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의 필요에 무관심한 삶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면서도 그 소유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자발적인 사랑과 나눔을 통하여 서로의 필요를 채우며 함께 살아가도록 가르친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와 개인과 정부가 성경의 공생주의에서 배워야 할 핵심은 “모두가 똑같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홀로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개인은 자신의 소유를 이웃과 나눌 줄 알며, 정부는 공정한 제도와 필요한 지원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존중하면서도 서로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공생주의가 오늘날 우리에게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1] Irvin B. Tucker, Economics for Today, 10th ed. (Cengage Learning, 2019), 794–795.

[2] 같은 자료, 795–796쪽.

[3] 같은 자료, 796–797쪽.

[4] “Communism vs. Socialism,” 『Diffen』.

[5] 같은 자료.

[6] 최건수,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서울: 쿰란출판사, 2013), 258–259쪽.



 

Saturday, October 3, 2026

평균의 경제학

평균의 경제학

 

위탁(委託)된 소유권(所有權)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인정하는 인간의 사적 소유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고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다. 스티브 엘워트(Steve Elwart)는 이를 “위임된 소유권(delegated ownership)”이라고 일컬었지만,[1] 나는 이것을 “위탁된 소유권(entrusted ownership)”이라고 부른다.  

위탁(委託)과 위임(委任)은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강조점에는 차이가 있다. “위임(委任)”은 자신의 권한이나 직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대신 행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재산 자체보다는 권한이나 책임 또는 직무를 맡기는 데 초점이 있다. 반면 “위탁(委託)”은 재산이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소유자는 여전히 따로 존재하며, 그 소유자가 자신의 재산에 대한 관리와 사용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관계가 강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시며 인간에게 재산과 자원을 맡겨 관리하고 사용하게 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표현하기에는 “위탁된 소유권(entrusted ownership)”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재산은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소유로 인정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자이자 청지기이다. 따라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절대적으로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진정한 소유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책임 있게 관리하고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신다(창 1:28).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더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금

구약성경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규정들이 나타난다(출 23:10–13; 레 19:9–10; 23:22; 신 14:28–29; 15:1–11; 24:19–22).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출 23:10–11). 또한 하나님께서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신 14:28–29). 이처럼 하나님은 토지와 십일조를 통하여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를 원하셨다.

니클(K. F. Nickle)에 따르면, 주후 1세기에 이르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는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는 “주후 1세기에 이르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규정은 지역 공동체에까지 확대되었다. 공동체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바구니 모금(basket collection)에 일정한 금액을 의무적으로 부담하였으며, 가난한 주민들은 이를 통하여 그 다음 한 주 동안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원을 받았다”고 설명한다.[2] 이러한 바구니 모금의 전통은 오늘날 교회에서 헌금 바구니를 사용하여 헌금을 모으는 관행과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물질적인 구호를 보낸 초대교회의 사례는 사도행전 11장 27–30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때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의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행 11:29–30; 참조 11:28). 이때 바울은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가 마련한 구호금을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대규모 모금 운동을 추진하는 데에도 중요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와 나눔은 바울의 선교 활동에서 부수적인 일이 아니라, 초대교회 시절부터 그가 직접 참여했던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모금 운동

바울은 그의 주요 네 서신인 로마서 15장 25–28절, 고린도전서 16장 1–4절, 고린도후서 8–9장,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9–10절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다루고 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는 그것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생활 방식이었든 그렇지 않았든 매우 가난한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이 그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모금에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시키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 모금 운동에 참여하여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영적인 유익이 그들이 드리는 헌금 자체의 금전적인 가치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믿었다. 바울은 이 모금 운동을 통하여 서로 다른 지도자들과 신앙적 입장 아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연합하고 화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특히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헌금한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지원을 넘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에게 자신의 생활비를 위한 돈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 운동에는 매우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여러 지역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사람들을 파송하면서 이 모금 운동을 추진하였다.  

바울을 배척하고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로마서 9–11장에서 이러한 바울의 마음을 잘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그의 생애 동안 적어도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하였다(행 13:1–14:28; 15:36–18:22; 18:23–21:14). 바울의 제3차 선교 여행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세운 여러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모아 심한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물질적인 가난과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았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일 년 전에 약속하였으나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던 모금을 마무리하라고 권면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보다 훨씬 가난한 형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꺼이 모금 운동에 참여한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을 좋은 본보기로 제시하였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보다 늦게 모금을 시작하였지만 기꺼이 참여하여 이미 그 일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참여한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특히 주목할 것은 마게도냐의 믿음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했기 때문에 많은 연보를 드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울은 그들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음에도 자원하여 자신들의 힘에 지나도록 연보에 참여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연보는 단순히 돈을 내는 행위가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었으며, 바울은 이러한 나눔을 “은혜”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른 성도들과 나누었다. 따라서 그들의 나눔은 물질적인 풍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을 돕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덕행, 곧 그들의 헌금과 관대함을 칭찬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헌금과 관대함(고후 8:2–5)은 하나님의 은혜(고후 8:1)에서 나온 것이다.[3] 배럿(C. K. Barrett)은 고린도후서 8장 1절에서 ‘카리스’(χάρις, charis)가 신학적인 의미의 “은혜”로 사용되고, 8장 4절에서는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 근거하여 다음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째, “마게도냐 사람들의 관대함은 곧 하나님 자신의 관대함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셨으며, 그 결과 그들이 관대한 사람들이 되었다.”[4] 이 본문에서는 두 번째 해석이 더 적절해 보이지만, 첫 번째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고린도후서 8장 2절에 나타난 그들의 관대함이 더욱 귀한 것은 그들이 가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기꺼이 자신들의 것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헌금은 자발적이었으며, 기쁨으로 드린 것이었고,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관대한 것이었다(고후 8:2–3).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그리스도인의 나눔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찾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은혜”로 번역된 말은 ‘카리스’(χάρις, charis)이다. 푀르스터(Foerster)에 따르면, “바울에게 있어서 ‘카리스’(χάρις, charis)는 구원 사건에 대한 그의 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는 중심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은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호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이다.[5]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이러한 은혜는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자기희생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난함을 통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으며,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과 나눔의 근거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은 단순한 자선 행위를 넘어, 먼저 자신에게 베풀어진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예수님 자신의 삶의 모범을 따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요하셨으며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삶을 사심으로 가난한 그의 백성을 그 안에서 부요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영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우리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게 하셨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도록 권면하였으며, 그들의 나눔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원하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과 후에 우리의 물질적인 소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 나오는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관대하게 나눌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었으며,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자신을 가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처럼,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도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어 줌으로써 다른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였다. 그 중요한 평행점을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2절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다(고후 8:12).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모금을 마무리하려는 열심을 보이라고 권면하였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에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원하는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빚을 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다른 사람들과의 나눔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빚을 더하면서까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6]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3–15절에서 평균(이소테스, ἰσότης, isotēs)의 경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3–15).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풍요와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 사이에 공평한 균형, 곧 평균을 이루는 것이었다.[7] 여기서 ‘평균(平均)’은 모든 사람이 정확히 같은 양을 소유한다는 산술적 평균이라기보다, 고린도후서 8장 13–15절의 ‘이소테스’(ἰσότης, isotēs)가 가리키는 “많이 가진 자의 남음과 적게 가진 자의 부족함을 조정하여 서로의 필요가 채워지는 상태”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아가야와 마게도냐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과 물질적인 것을 나누는 것은 바울에게 매우 공평한 일로 보인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7절에서 “저희가 그들을 기뻐서 섬겼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한다. 즉, 아가야와 마게도냐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영적인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받은 영적인 것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갚는 것은 바울에게 공평한 나눔이었다.

고린도후서 8장 14절 하반절의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풍요를 이방인들과 나누었듯이, 이방인들도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그 성도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롬 15:27). 둘째, 지금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유대인 성도들과 나눈다면, 훗날 이방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유대인 성도들이 자신들의 물질적인 또는 영적인 풍요를 이방인들과 나누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배럿(Barrett)은 바울이 “훗날 고린도 교회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형편에 있게 된다면, 그들이 이방인 형제들과 자신들의 것을 나눌 것이라는 의미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8] 배럿은 첫 번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로마서 15장 27절에 비추어 볼 때 그것 역시 평등 또는 공평한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평균” 또는 “공평한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 

평균(平均)의 경제학

바울에 따르면, 평균의 경제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풍요를 지금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면 훗날 다른 때에, 지금 우리의 풍요를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그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풍요가 무엇이든지 간에, 가난한 형편에 처하게 된 우리와 그것을 나누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호적인 나눔을 통하여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평균 또는 공평한 균형을 이루게 된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돕기 위하여 우리가 빚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많든 적든, 그것을 기꺼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평균의 경제의 근거는 출애굽기 16장 18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후 8:15 참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 사람이 먹을 만큼 만나를 거두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두었고 어떤 사람은 적게 거두었다(출 16:16–17). 출애굽기 16장 18절은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거나 지나치게 적게 소유하기보다 그들 사이에 평균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도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었다. 그러자 남겨 둔 만나에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출 16:19–20).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1–12절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설명하며,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에게서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이라는 신령한 것을 전하였으므로, 그들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인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은 물질적인 보상을 받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데 조금이라도 장애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물질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무런 장애 없이 전파되는 것이었다.[9]

대신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빚진 자로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을 통하여 영적인 풍요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에 빚진 자가 되었으므로, 이제 심한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과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나누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대하여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다시 한번 바울의 평균의 경제를 보여 주는 기본 원리를 잘 나타낸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복음이라는 신령한 것을 나누어 받았으며,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육적인 것, 곧 물질적인 것으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섬기게 되었다. 한쪽은 신령한 것을 나누었고 다른 쪽은 육적인 것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채워 준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나눔을 단순한 자선 행위로 보지 않고, 신령한 것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눔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그 기본 원리가 있다.[10]

지금 자신에게 어떤 것이 풍족하게 있다면,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과 기꺼이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도 훗날 자신들에게 풍족한 것이 있고 우리에게 그것이 부족할 때 자신들의 풍요를 우리와 나누게 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돈, 시간, 토지, 노동 등과 같은 물질적인 풍요일 수도 있고, 사랑, 은혜, 복음 등과 같은 영적인 풍요일 수도 있다. 이처럼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자신에게 현재 풍족한 것을 부족한 사람들과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상호적인 나눔의 원리에 기초한다.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번성하고 증가하여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부유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가난하게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먹이시고 그들이 모두 배부르기를 원하시며, 또한 그들 각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님이시며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셨지만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의 가난을 통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고후 8:9)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복을 받고 영원히 살게 하셨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 곧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던 무리를 먹이셨으며, 그들에게 서로 나누는 삶을 가르치셨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러한 나눔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그리고 주인과 종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평균의 경제를 가르쳤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6–29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균과 하나 됨을 강조하며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균은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사이의 모든 사회적 차이가 사라진다는 의미라기보다, 그러한 차이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치나 신분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는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16절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하나 됨을 강조한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던 장벽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너졌음을 설명하며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한다.

이처럼 갈라디아서에서는 인종과 사회적 신분과 성별의 차이를 넘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강조하고, 에베소서에서는 특별히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았던 장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무너지고 둘이 “한 새 사람”과 “한 몸”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평균은 모든 사람의 사회적·경제적 조건을 동일하게 만드는 획일적인 평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에 참여하는 평균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단지 물질적인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종이나 민족, 성별, 사회적 계층, 부의 정도, 나이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차이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차이 때문에 어느 누구도 차별받거나 다른 사람보다 더 높거나 낮은 존재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바울의 평균의 경제를 이어받은 존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께서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물질적인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르셨으며, 이것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섭리적인 경제적 사명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영적인 부를 부유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르셨으며, 이것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섭리적인 영적 사명이라고 말한다(고후 8:14 참조). 따라서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자 종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자들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평균의 경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는 획일적인 경제적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시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위탁된 소유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풍족한 것이 있을 때에는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과 기꺼이 나누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 그리고 훗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풍요를 통하여 우리의 필요가 채워질 수 있다. 이러한 나눔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평균(이소테스, ἰσότης, isotēs)은 많이 가진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고 적게 가진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모두의 소유를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5)는 원리에 따라 서로의 풍요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다. 이러한 평균의 경제는 물질적인 부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간, 노동, 재능, 사랑, 은혜, 복음과 같은 우리 삶의 모든 풍요에 적용될 수 있다. 그 궁극적인 모범은 부요하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고후 8:9). 따라서 평균의 경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것을 서로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줌으로써 모두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랑과 나눔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평균의 경제는 경제적·사회적 불평등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과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첫째, 성경이 말하는 평균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소득이나 재산을 가져야 한다는 획일적인 평균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받은 능력과 맡은 일과 소유한 것이 다른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풍요로운 반면 다른 사람은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권하면서 말한 평균의 목적은 가진 사람의 나눔을 통하여 부족한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데 있었다.

둘째, 성경의 평균은 강제적인 재산의 동일화보다 자발적인 나눔을 강조한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도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지만 다른 성도들을 돕는 일에 자원하여 참여하였다(고후 8:1–5). 바울은 그들에게 억지로 재산을 내놓으라고 강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응답하여 자발적으로 나누는 삶을 보여 주었다고 칭찬하였다. 따라서 성경의 평균은 모든 사람의 소유를 강제로 같게 만드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기꺼이 나누는 데서 출발한다.

셋째, 이러한 나눔의 가장 중요한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그의 가난함을 통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고 말한다(고후 8:9).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단순히 부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남는 것을 나누어 주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고 내어 주심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균의 경제는 자기중심적인 축적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는 삶을 지향한다.

넷째, 성경이 말하는 평균은 물질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신령한 것을 나누어 받았고, 그들은 다시 육적인 것으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섬겼다(롬 15:25–27). 한쪽은 신령한 것을 나누고 다른 쪽은 물질적인 것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따라서 평균의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가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것이다.

다섯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균은 사람의 가치를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한다(갈 3:28).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을 “한 새 사람”과 “한 몸”으로 만드셨다(엡 2:14–16). 이러한 하나 됨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현실적인 차이가 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차이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치와 신분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재산과 소득이 사람의 가치와 사회적 존중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이러한 가르침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경제적 능력과 노력의 차이에 따라 어느 정도의 소득과 재산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회의 일부가 풍요를 누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음식과 주거, 교육과 의료와 같은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어려움을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많이 가진 사람은 자신의 풍요를 다른 사람의 필요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기업과 사회도 경제적 성장의 혜택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집중되지 않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정부도 모든 사람의 소득과 재산을 똑같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지향할 것은 아니지만, 지나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삶의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조세와 사회보장, 교육과 직업훈련, 공정한 경제적 기회의 제공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개인의 책임과 경제활동의 동기를 지나치게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를 실제적으로 채워 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평균의 경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져야 한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진 사람의 풍요가 부족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그것은 획일적인 결과의 평균보다 사랑과 나눔을 통한 필요의 충족을 지향한다. 또한 물질적인 차이를 넘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불평등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의 평균의 경제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나는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통하여 누구의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현대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모든 사람을 똑같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것을 나누며, 아무도 기본적인 필요에서 소외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의 평균의 경제는 불평등을 획일적인 동일화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본받은 자발적인 나눔과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는 삶을 통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1] S. Elwart, “Biblical Principles of Economics,” Koinonia House (October 1, 2011).

[2] K. F. Nickle, The Collection: A Study in Paul’s Strategy (Alec R. Allenson Inc., 1966), 93–94.

[3] 최건수, 『약할 때 곧 강함이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5 — 고린도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1), 221–223쪽.

[4]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Harper & Row, 1973), 218.

[5] Foerster, TDNT, vol. 9 (1974), 393.

[6] 최건수, 『약할 때 곧 강함이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5 — 고린도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1), 234쪽.

[7] 같은 자료, 235.

[8]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Harper & Row, 1973), 226.

[9] 최건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시리즈 4 ― 고린도전서』 (서울: 쿰란출판사, 2000), 238쪽.

[10] 최건수,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오이코노미아 성경강해 시리즈 1 ― 로마서』 (서울: 쿰란출판사, 1999), 318–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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