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7, 2026

부, 빈곤과 소득 불평등

부, 빈곤과 소득 불평등

 

부(富)

다시 하나님의 경제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복을 주셨으며(창 1:28), 창세기 9장 1절과 7절에서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동일한 말씀으로 다시 복을 주셨다. 창세기 1장 28절과 9장 1, 7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페루’(פְּרוּ, pĕrû; 파라, פָּרָה pārâ에서 유래)는 “생육하라,”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며, 구약성경에서 29회 사용된다.[1] 창세기 1장 28절과 9장 1, 7절에 나오는 또 다른 히브리어 ‘레부’(רְבוּ, rĕḇû; 라바, רָבָה rāḇâ에서 유래)는 “많아지다,” “번성하다”라는 뜻이며, 구약성경에서 230회 사용된다.[2]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지며 재산도 증가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사람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가리키지만, “번성하다”라는 개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증가와 풍요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17장 6절과 8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에 대한 복을 약속하시며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여러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고 약속하셨다(창 17:20).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육과 번성의 복은 후손의 증가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풍요로도 나타났다.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의 주인이 받은 복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라고 말한다(창 24:35).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은 많은 후손과 약속의 땅뿐만 아니라 가축과 은금 등 물질적인 재산의 증가로도 나타났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이러한 물질적인 복이 이어졌다. 창세기 26장 12–14절은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라고 기록한다. 이삭의 부는 단순히 그의 노력의 결과로만 묘사되지 않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얻게 된 것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복은 생육과 번성, 땅과 후손뿐만 아니라 때로는 물질적인 풍요와 경제적인 번영으로도 구체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창대하다” 또는 “크게 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어 ‘가달’(גָּדַל, gāḏal)은 “크다,” “크게 되다,” “창대하다,” 또는 문맥에 따라 “부유해지다”라는 뜻을 가진다.[3] 이 히브리어 ‘가달’(גָּדַל, gāḏal)은 구약성경에서 115회 사용된다. 이삭의 경우에는 그가 소유한 양과 소와 많은 종들이 함께 언급되기 때문에,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물질적인 부가 크게 증가하였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은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졌다. 이삭은 창세기 28장 3–4절에서 야곱을 축복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창세기 35장 11–12절에서 야곱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생육과 번성의 복, 그리고 땅에 대한 복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도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따를 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우리의 자녀들과 그 후손들에게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신 5:10).

그러나 우리가 물질적인 부를 얻었을 때 그것을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세는 신명기 8장 17–1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생각을 경계하도록 가르치며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재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일’(חַיִל, ḥayil)은 “힘,” “능력,” “군대,” 또는 “재물, 부”라는 뜻을 가진다.[4] 이 히브리어 ‘하일’(חַיִל, ḥayil)은 구약성경에서 224회 사용된다. 신명기 8장 17–18절에서는 이 단어가 “재물” 또는 “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능력과 힘으로 부를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부를 얻을 수 있는 능력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빈곤(貧困)

빈곤은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문제이며, 성경도 여러 곳에서 빈곤의 문제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 준다. 성경은 빈곤을 단순히 개인의 책임이나 노력 부족의 결과로만 보지 않는다. 질병이나 재난, 사회적 환경과 불공정한 관계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사람이 가난에 처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러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돌보라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신명기 15장 7–8절에서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닫지 말고 그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가르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한다. 또한 잠언 22장 22–23절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처지를 이용하여 그들을 착취하거나 억압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가난한 형제자매와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기를 원하신다. 구약의 율법에서도 추수할 때 밭의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않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음으로써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이 먹을 수 있도록 하셨으며(레 19:9–10), 안식년에는 가난한 형제에게 손을 펴고 필요한 것을 넉넉히 꾸어 주도록 하셨다(신 15:7–8). 이러한 규정들은 가난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려는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 준다.

신약성경에서도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은 계속된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사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중요한 대상으로 언급하셨다(눅 4:18). 초대교회도 어려움에 처한 믿음의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으며,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라고 할 정도로 서로의 필요를 돌보았다(행 4:34–35).

따라서 빈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을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데 머물지 않는다. 성경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필요를 실제적으로 도와주고, 그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착취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그들과 나누라고 가르친다. 동시에 가난한 사람도 단순히 도움에 의존하기보다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도움과 개인의 책임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빈곤의 문제를 바라볼 때에는 가난한 사람의 책임만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모든 책임을 사회에 돌리기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고 그가 다시 자립할 수 있도록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복 또는 저주로서의 부와 빈곤

성경 전체에서 부는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부자들이 불법적이거나 악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였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따라서 모든 부가 반드시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빈곤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라고 할 수 없다. 때로는 빈곤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게으름으로 인하여 가난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부와 빈곤을 단순히 하나님의 복과 저주로 구분하기보다는, 그 부를 어떻게 얻었는지 그리고 빈곤이 어떠한 원인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의 성경 구절들에서는 부가 하나님의 복으로, 빈곤이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지는 것으로 보인다:

잠언 8장 20–21절: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잠언 10장 4절: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0장 15절: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

잠언 19장 4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잠언 21장 5절: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그러나 다음의 성경 구절들에서는 부가 하나님의 저주로, 빈곤이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보인다:

잠언 15장 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7장 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아굴은 잠언 30장 7–9절에서 하나님께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한다.

아굴은 지나친 부와 지나친 빈곤이 모두 신앙생활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음을 인식하였다. 지나치게 부유해져서 자신의 풍요에 만족한 나머지 하나님을 잊고 “여호와가 누구냐”고 한다면, 그러한 부는 그에게 참된 복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지나친 빈곤으로 인해 도둑질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면, 그러한 가난 역시 바람직한 상태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아굴은 부 자체를 구하지도 않고 가난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지나친 부나 빈곤 대신 자신의 삶에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하나님께 공급해 달라고 구하였다.

이러한 아굴의 기도는 성경이 물질적인 부를 무조건 하나님의 복으로 여기거나 가난 자체를 신앙적인 미덕으로 보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에 만족하며 그분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상의 성경 구절들을 종합해 보면, 부 자체가 언제나 하나님의 복이고 빈곤 자체가 언제나 하나님의 저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일하여 얻은 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될 수 있지만,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부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고 교만하게 만드는 부는 진정한 복이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빈곤도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라고 할 수 없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한다면 적은 소유로도 평안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게으름으로 인하여 가난하게 되거나, 극심한 빈곤으로 인하여 도둑질과 같은 죄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은 단순히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부의 많고 적음보다 그것을 어떻게 얻었으며, 어떻게 사용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아굴의 기도처럼, 지나친 부로 인하여 하나님을 잊어서도 안 되고 지나친 빈곤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을 올바르게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제 안에서 살아가는 청지기의 올바른 자세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부와 빈곤

예수님의 말씀에서 부는 하나님의 복으로만 여겨지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선택 또는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선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의 첫째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도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부모나 가족을 문자 그대로 미워하라는 뜻이라기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가족이나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도 우선해야 한다는 강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물도 하나님보다 우선될 때에는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청년이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은 처음에는 그 청년에게 비교적 쉬워 보이는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마 19:17). 그러자 청년은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물었다(마 19:18).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9:18–19). 그 청년은 자신 있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대답하였다(마 19:20).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9:21). 그러나 그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갔다. 그에게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다(마 19:22). 이 부자 청년은 자신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였지만 자신의 부, 곧 재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재물을 포기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신이 지켰다고 생각했던 계명들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부자 청년에게 그의 부는 하나님의 복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19장 23–24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라기보다, 부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보다 앞설 때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반면에 빈곤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3).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복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도 제자들을 보시며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눅 6:20). 따라서 빈곤 그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거나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인 가난은 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겸손하게 의지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20–21절에서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의사였던 누가는 여기서 “가난한 자”를 단순히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누가는 마태복음 5장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와 달리 “심령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가난한 자”라고 기록하였다. 물론 이것이 누가가 의도적으로 “심령이”라는 말을 생략한 이유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비윤리적인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서 제자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주인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자기의 재산을 맡겼다. 그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 한 달란트는 대략 6,000데나리온에 해당하였으며, 한 데나리온은 당시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50 달러 (또는 20만원)라고 가정한다면, 한 달란트는 대략 90만 달러 (또는 1,200만원)에 해당하는 매우 큰 금액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마 25:16).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를 더 남겼다(마 25:17).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따라서 그는 주인이 맡긴 돈으로 아무런 수익도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마 25:18).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하였다(마 25:19).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하였다(마 25:20). 그러자 주인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였다(마 25:21).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하였다(마 25:22). 주인은 그에게도 똑같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였다(마 25:23).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라고 말하였다(마 25:24–25). 그러자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고 책망하였다(마 25:26–27).

달란트의 비유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여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원리를 우리의 경제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능력과 재산을 잘 관리하고, 열심히 일하여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며, 우리의 재산을 지혜롭게 관리하여 더 나은 삶을 이루는 것도 청지기로서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직한 방법으로 일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신다면, 열심히 일하여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자체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돈을 사랑함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거나 사랑한다. 하워드 데이턴(Howard Dayton)은 성경에 돈과 관련된 구절이 2,350개나 있다고 지적한다.[5]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돈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돈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눅 16:11). 우리는 더 중요한 영적인 일에도 충성하기 위해서 돈을 올바르고 충성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는가는 단순한 경제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충성됨과도 관련되어 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한다(딤전 6:10).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도 선택 또는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돈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돈이나 부 자체가 도덕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지나친 탐욕이나 지나친 사랑은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장로교 전통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에 따르면, 돈은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표지로서의 기능도 한다. 칼빈의 경제사상에 비추어 볼 때, 돈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곧 (1) 은혜의 표지와 (2) 정죄의 표지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목적을 위하여 돈을 사용한다면, 돈은 하나님의 은혜의 표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돈이나 돈이 주는 힘을 삶의 첫째 자리에 둔다면, 돈은 정죄의 표지가 된다(딤전 6:10).

2007–2009년 미국의 금융위기는 주택시장 거품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와 기업인들의 비윤리적인 행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돈이나 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비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세속적인 세계관과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인 반면, 비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이 세상과 돈과 같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우선될 수 있다..

여러분 가운데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나님과 돈 가운데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여러분의 삶과 의사결정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돈보다 우선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주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신을 위하여 일하면 5,000 달러(또는 5백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교회에 가야 하므로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나타난 바울의 말씀은 우리 역시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실제 삶에서 직면할 수 있는 하나의 도전이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 시험을 받아 그의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도 돈보다 하나님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

야고보서에 나타난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야고보서 2장 5–7절은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을 대조하면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야고보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하신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람의 참된 부요함은 물질적인 재산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나라를 상속받는 데서도 찾아야 한다.

야고보서에서 부한 자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을 야고보가 부 자체나 모든 부한 사람을 정죄한 것으로 확대하여 이해할 필요는 없다. 야고보가 특별히 책망하는 것은 부를 축적하는 과정과 사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의한 행동이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서는 품꾼에게 마땅히 지급해야 할 삯을 주지 않고 재물을 쌓으며,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의인을 정죄하고 죽이는 부한 자들의 행동을 책망한다. 따라서 야고보가 문제로 삼는 것은 단순히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기보다, 자신의 부와 힘을 이용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몫을 빼앗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소득 불평등

소득 불평등은 오늘날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부 또는 소득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으며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빅터 클라(Victor V. Claar)와 로빈 클레이(Robin J. Klay)는 미국에서 평균적인 근로자의 경제적 형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어려워졌으며, 대학 졸업자와 고등학교 졸업자 사이의 소득 격차도 더욱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6] 이러한 소득 불평등의 확대는 미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기술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까? 잠언 22장 2절은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빈곤과 소득 불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 사도행전 2장 44–45절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라고 말한다. 또한 사도행전 4장 32절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고 말한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소득 불평등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8–9장에서 평균 (또는 균등)의 경제를 강조한다. 당시 바울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헌금을 모으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한다(고후 8:13–14).

바울은 이러한 생각의 근거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거두었던 출애굽기 16장 16–18절에서 찾는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라고 말한다(출 16:16–18). 실제로 바울은 이 말씀을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서 직접 인용하여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7]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 부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도 않고 빈곤 자체를 하나님의 저주로 보지도 않는다. 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될 수 있지만, 불의한 방법으로 얻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될 때에는 오히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니며, 부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얻고 어떻게 사용하며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제에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부한 사람은 자신의 부를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 되며,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눌 책임이 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소유를 서로 나누어 공동체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던 것처럼(행 2:44–45; 4:32),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친 “평균”의 원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경제를 잘 보여 준다. 넉넉한 사람의 것으로 부족한 사람의 필요를 채움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균등을 이루는 것은 부한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 자신이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다(고후 8:13).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평등의 경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재산이나 소득을 가져야 한다는 절대적인 경제적 평등을 의미하기보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고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나눔으로써 지나친 경제적 격차와 빈곤을 줄여 가는 경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빈곤과 소득 불평등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 모두를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잠 22:2),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돈보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먼저 선택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부를 충성스럽게 관리하며, 필요한 사람들과 기꺼이 나누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빈곤과 소득 불평등을 줄이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평등의 경제”를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빈곤을 줄이고 지나친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여 모든 사람이 보다 안정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본 장에서 살펴본 부와 빈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사회를 바라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첫째, 성경은 부 자체를 악으로 보거나 빈곤 자체를 미덕으로 보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누렸던 물질적인 풍요는 하나님의 복으로 묘사되지만, 아굴은 지나친 부와 지나친 빈곤을 모두 경계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양식을 구하였다(잠 30:7–9). 따라서 성경이 지향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재산을 소유하는 사회라기보다, 물질적인 부가 하나님을 잊게 하거나 빈곤이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위협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부를 얻은 사람은 자신의 재물이 오직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가르쳤다(신 8:17–18). 따라서 부를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의 절대적인 소유로만 여기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필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도 사용할 책임이 있다.

셋째,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거나 그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증가시키는 것을 경계한다. 하나님은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완악하게 하거나 손을 움켜쥐지 말고 필요한 것을 넉넉히 주라고 명하셨으며(신 15:7–8), 약한 사람을 탈취하거나 곤고한 사람을 압제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잠 22:22–23). 야고보도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을 책망하고, 품꾼의 삯을 주지 않으면서 재물을 쌓고 사치하는 부한 자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약 2:5–7; 5:1–6). 따라서 가난한 사람의 희생을 통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람직한 부의 모습이 아니다.

넷째, 소득 불평등의 문제에서도 단순히 모든 사람의 소득을 똑같게 만드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람마다 능력과 직업, 노동과 선택,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소득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지나치게 커져 일부 사람들은 풍요를 누리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음식과 주거와 같은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시키기 어렵다면,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이삭 남기기, 십일조를 통한 구제, 안식년의 부채 면제와 같은 제도들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가 외면되지 않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 준다.

다섯째, 빈곤과 소득 불평등의 문제는 부한 사람이나 정부만의 책임도 아니며, 가난한 사람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개인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고 재정을 책임 있게 관리해야 하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어려운 이웃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사람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지 않아야 하며, 정부도 국민이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필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책임과 함께 가족과 이웃, 기업과 사회, 정부의 역할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더 나은 사회는 단순히 부자가 없는 사회도 아니며, 모든 사람이 똑같이 소유하는 사회도 아니다. 또한 경제성장과 부의 축적 자체를 부정하는 사회도 아니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여 얻은 정당한 부는 인정하면서도, 부한 사람은 자신의 풍요만을 추구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과 나누며, 가난한 사람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지 않고 자신의 필요를 채우며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얻는 사회이다. 부와 빈곤의 차이가 사람의 가치와 존엄성을 결정하지 않고,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서로를 외면하지 않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를 만들어 낼 것인가?”만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 과정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희생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풍요가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도 도움이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해야 한다. 성경이 보여 주는 부와 빈곤에 관한 가르침은 경제적 풍요와 함께 나눔과 자비가 있고, 가난한 사람도 존중받으며 필요한 도움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우리를 이끈다.



[1] Strong’s Hebrew Concordance, “6509. parah,” 『BibleHub』.

[2] 같은 자료, “7235. rabah,” 『BibleHub』.

[3] 같은 자료, “1431. gadal,” 『BibleHub』.

[4] 같은 자료, “2428. chayil,” 『BibleHub』.

[5] Howard Dayton, Your Money Counts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1996), 4–5.

[7] 최건수,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서울: 쿰란출판사, 2013), 249–251, 255–257쪽.




부, 빈곤과 소득 불평등

부 , 빈곤과 소득 불평등   부 ( 富 ) 다시 하나님의 경제로 돌아가 보면 ,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 창 1:28), 창세기 9 장 1 절과 7 절에서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동일한 말씀으로...